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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 윌리엄 골딩

by 이룸


문명 세계에서 살던 소년들이 비행기의 추락으로 무인도에 닿았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런 모티프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처음엔 서로 규칙을 정하고 민주적으로 질서를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금세 분열이 생긴다.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문명 세계의 질서에 고분고분 따라야 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지할 대상(어른들)도 없다. 스스로 먹을 것을 마련해야 한다.


'랄프'쪽에선 불을 피워올려 구조되는 것에 온힘을 기울인다. 반면 '잭'쪽에서는 사냥을 통해 멧돼지를 잡는 것에 열을 올린다. 그렇게 두 개의 집단(두 개의 사고방식)으로 분리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무게 중심은 '잭'쪽으로 기운다. 문명 세계가 부여하는 법이나 도덕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물리적인 힘이 지배하는 원시 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먹고사는 게 최우선인 상황이 된다. 이 소설에서는 소년들만으로 인물을 설정했지만, 어른들만으로 설정해도 그리 크게 달라지는 건 없으리라. 남녀가 같이 등장한다면 더욱 복잡한 양상의 야만성이 펼쳐질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을 지배하는 건 공포다. 문명 세계에서도 그렇건만, 원시 상태에서는 오죽하겠는가. 폭풍이라도 한 번 불어오면 어디에 숨어 있을 것이며, 사나운 괴수라도 맞닥뜨리면 어떻게 대적하겠는가. 그런 공포가 '헛것'을 머릿속에 만들게 하고, 멧돼지의 머리를 꽂아 제의를 지내게 한다. 이 소설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소년 사이먼만이 공포의 실체와 맞닥뜨리며 사태의 본질을 명확히 본다. "괴수의 존재는 다만 우리들 자신뿐이다."


하지만 사이먼의 말을 제대로 듣고 이해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자신들의 두려움이 만든 공포를 없애기 위해 무리를 짓고 권력을 형성한 '잭' 무리들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의해 사이먼은 희생된다.


문명 세계의 논리가 이러한 원시 상태로부터 멀리 벗어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조금 더 복잡한 양상으로 숨겨져 있을 따름이다. 언제든 우리는 야만 상태로 퇴행할 잠재태를 지니고 살아간다. 예컨대, 우리는 여전히 권력 앞에 무기력하다. 예컨대, 우리는 여전히 '헛것' 앞에 무기력하다.


문명세계가 퇴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첫째, 권력이 사람 위에 군림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며, 둘째, '헛것'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게 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대한민국에서는 그 두 가지를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내란을 일으킨 우두머리는 파면되었지만 내란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자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안위를 도모하며 국정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소설은 1954년에 발표되었으며, 1992년 해리 후크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지은이 : 윌리엄 골딩

옮긴이 : 이덕형

펴낸곳 :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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