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by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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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다시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의 소설 <날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어두운 공간에서 자폐적으로 살아가던 ‘나’가 거리로 나와 거닐다가 각성을 하며 삶의 의지를 다지는 모습입니다. ‘날개’는 우리 인간에게 꿈이나 이상의 의미로 오래전부터 비유적으로 쓰여 왔습니다. 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날고 싶은 욕망이 투영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 조나단>에서도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멋진 문구가 나옵니다. 높은 꿈이나 이상을 지니고 살아야 자질구레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큰 틀로 사유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임재범의 노래 <비상>도 세상에 나가서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를 활짝 펼쳐 보이고 싶은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날다’의 반대 개념은 ‘기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날다’는 ‘하늘 높이 자유롭게’와 자연스레 연결되고, ‘기다’는 ‘굼뜨다, 비굴하다’ 등의 의미와 결부됩니다. 라디오헤드의 노래 <Creep>는 천사 같은 ‘그녀’에 비해 보잘것없는 자신을 ‘Creep’이라고 하며 괴로워하는 남자의 비통한 절규입니다. ‘Creep’는 사전적으로 ‘기다’의 의미이고, 아마도 속어로 ‘머저리’나 ‘쪼다’ 등의 의미로 영어권에서 쓰이나 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에는 인간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새나 나비는 인간이 원하지만 할 수 없는 걸 행할 수 있어서 좋게 보는 것이고, 기어 다니는 동물들의 행동은 이족보행을 하는 인간도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어하는 행동이죠. 예로부터 상대방을 굴복시키거나 모멸감을 느끼게 할 때 하는 대표적인 말이 “내 앞에서 기어 봐라.”였으니까요.


위 사진은 2019년 4월에 백로공원에서 촬영한 왜가리이고, 아래 사진은 2015년 3월에 살던 곳(삼천동)의 옥상에서 촬영한 솔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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