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flower 5

by 이룸

그래서 방은 주로 쉬는 날에만 들어가게 되었다. 무언가 써야겠다는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저 책을 좀 보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라 좀 끼적거리다 보면 금세 하루가 지나갔다. 그런 생활이 10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씻은 후 책을 둘러보다가 잠이 든 듯했다. 그녀의 머리맡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놓여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책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다른 책들은 조금 읽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쓴 건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외계인의 언어였다.

발가벗은 채 웅크리고 누워 있는 그녀, 그리고 머리맡에 놓인 버지니아 울프의 책 한 권. 그것은 강렬한 사진 한 컷을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그 모습은 흥분을 솟구치게 하기 보다는 왠지 모르게 처연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를 나는 아직 해독할 수 없었다, 조금도. 그녀는 해독하기 힘든 한 권의 책에 다름 아니었다.

밥솥에 쌀을 안치고 나서 참치찌개를 데우고 있을 때 그녀가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여전히 발가벗은 상태였다.

“냄새가 구수하네요.”

그녀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나는 다시금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고스란히 드러난 그녀의 봉우리와 숲 앞에서. 그러나 이제 흥분이 솟구치기보다는 어색함과 불편함이 더 컸다. 옷 좀 입었으면 좋겠는데, 싶은 말이 입 안을 맴돌았다. 베일에 가려 있어야 더 흥분을 자아내는 것 아니던가. 적나라함은 신비감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게 할 텐데…… 섣부른 노파심이 머릿속에 끼어들 지경이었다.

“우리 함께 사는 게 어때요?”

그녀가 말을 툭 던지곤 욕실로 들어갔다. 좋다 뿐이겠는가. 입 안에서 맴돌던 미소가 씰룩씰룩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만나자마자 관계를 맺고 함께 살기까지! 아, 이제 드디어 희부연 안개 속 같았던 내 인생길이 뚜렷하게 펼쳐질 것인가. 칙칙한 삶에 환한 빛이 쏟아져 내릴 것인가. 나는 밥과 찌개를 그릇에 담으며 연거푸 엉덩이를 좌우로 앞뒤로 흔들어댔다.

여자는 욕실에서 나와 수건을 의자 위에 깔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몸을 대충 닦아서인지 몸 여기저기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과일에 물기가 서려 있는 것처럼이나 탐스러운 자태에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고, 흥분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음식을 잘 하시네요?”

그녀가 찌개를 한 입 집어넣은 다음 말했다.

“에이, 별말씀을, 김치와 참치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집에 있을 땐 늘 그렇게 벗고 지내세요? 밥 먹을 때나 잠잘 때나……?”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밖에서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순 없고, 집에서라도 홀가분하게 지내야죠. ……밥 먹고 나서 짐 옮기러 같이 가주실 거죠?”

“아, 물론이죠. 근데, 짐이 많으면 이곳이 발 디딜 틈 없어지겠는데요.”

그러자 그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가방 한두 개면 돼요. 옷, 신발, 화장품 정도. 나머지는 팔아넘기거나 버릴 거예요.”

“꼭 그러실 필요까지야…….”

“많이 지니고 있어 봤자 거추장스러울 뿐이에요.”

“훌훌 벗어던지는 데 능란하시군요.”

나는 해글해글 웃음 지으며 말했다.

*

그렇게 시작된 동거였다.

내 인생이 환하고 뚜렷하게 펼쳐질 것이란 생각은 오판에 불과했다. 쉽게 다가온 행운에는 그만큼 조심스레 견제해야 할 요소들이 많다는 격언을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겪어 본 뒤에서야 나타나기 마련인 깨달음 아니던가. 겪어보기 전에는 눈앞의 달콤함만을 상상하기 마련 아니던가.

고문과 같은 시간들의 시작이었다. 집에서는 항상 발가벗고 지내는 그녀. 그래서 그동안 해소하지 못한 리비도를 언제든 마음껏 해소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아니었다. 내가 다가서려고 하면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막힌 곳에서는 싫어요.”

그럼 지금 당장 숲에 가자고 나는 애 닳아하며 소리쳤다. 그러면 그녀는 피식, 웃음을 날리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카프카처럼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모든 에너지를 글쓰기에 쏟아 부어도 모자랄 판에 왜 정신이 엉뚱한 데 가 있는 거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발가벗은 여자의 몸이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는 상황에서 글쓰기 같은 게 될 턱이 없잖은가. 제 아무리 카프카라도, 톨스토이라도, 도스토옙스키라도 그것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리하여 나는 욕실에 들어가 자위행위를 하곤 했다. 눈을 꼬옥 감고, 숲속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러곤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와 함께 사는 것이 즐겁지가 않았다. 오히려 비참하게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그녀는 왜 나에게 다가온 것일까? 날 괴롭히기 위해서? 날 시험에 들게 하려고? 진수성찬을 차려놓고서 자, 마음껏 보세요, 먹지는 말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쉽게 다가온 행운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따른다더니…….

그녀는 한마디로 조울증적이었다. 조증과 울증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평소에는 늘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보면서 깔깔거렸다. 개그나 예능, 다큐 프로그램을 주로 보았다. 그것도, 빨대로 맥주를 빨아대면서 말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세상물정 모르고 편하게 자라난 말괄량이 소녀를 보는 듯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소파나 침대에 이불을 덮고 웅크리고 누운 채 꼼짝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말을 걸어도 대꾸도 하지 않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며칠 동안 깊은 우울 속에 잠겼다. 그럴 땐 꼭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끌어안고 살아온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런 어느 날 나에게 다가와 숲에 가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밤중에. 숲에 가서 마음껏 울부짖고 돌아오면 다시 조증 상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