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그녀의 모습이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작은 크기의 공터가 나타났고, 하늘이 동그랗게 열려 있었다. 휴, 나는 숨을 돌렸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찌이익,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하얀 브래지어와 팬티만을 걸친 모습이 나타났다.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어 내린 것이었다. 어, 뭐지? 생각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하얀 브래지어와 팬티가 바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로 다가와 내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오, 이런! 화끈한 건 좋지만, 차 안으로 가면 안 될까? 왜 굳이 이런 곳에서…….
그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몸을 내맡겼다. 어둠에, 그리고 그녀의 과감함에 압도되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옷을 입고 있을 땐 시원한 느낌이었는데, 알몸이 되고 나니 싸늘한 기운이 끼쳐왔다.
그녀가 풀 위에 드러누웠고, 나는 그녀의 위로 몸을 포개었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싶은 생각 같은 건 어둠에 잡아먹혀 숨을 내쉬지 못했다. 오로지 본능만이 제 갈 길을 갔다. 따뜻한 체온과 접촉하자 싸늘한 기운이 물러갔다. 그와 함께 내 안의 저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원시의 생명력 같은 것이 불끈 솟구치는 듯했다.
“내가 당신을 가까이 오게 했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가 내 머리를 끌어당겼고, 그녀와 나는 키스에 돌입했다.
그녀가 나를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내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마음껏 소리를 내질렀다.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순간 숲에서 나던 모든 소리가 숨을 죽였고, 달빛과 별빛은 광도를 한 단계씩 더 높였으며, 나는 온 우주의 기운을 끌어 모았다가 다시 세상을 향해 내뿜는 듯한 희열에 사로잡혔다.
“어디로 가면 되죠?”
차 안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서먹함을 떨쳐내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경민 씨 사는 곳으로 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진 채 나왔다. 숲속에서 마음껏 소리를 내지른 결과였다. 그녀는 손으로 목을 매만지며 음, 음, 하고 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곤 겸연쩍은 표정을 한 채 미소 지어 보였다.
집에 안 갈 거예요? 같은 말이 입 안을 맴돌았지만,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나야 뭐 좋고말고. 시간은 이제 두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방금 전 숲속에서의 기억이 자꾸만 머릿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잠시 꿈속의 세계에 다녀온 것처럼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비현실적인 경험에 뒤따른 서먹한 기운이 여전히 온몸을 휩싸고 있었다. 하루 전만 해도, 아니, 몇 시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한 일이지 않은가.
나는 운전을 하며 흘깃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앉아 있었다. 마음껏 울부짖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가 내지르던 소리가 떠오르자 다시금 흥분이 불쑥 솟아올랐다.
실로 8년만이었다. 대학 다닐 때 만난 여자, 지영과 헤어진 이후로 말이다. 지영과는 관계를 맺기까지 6개월 넘는 기간이 걸렸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애걸복걸하며 얻어낸, 지난한 쟁취의 과정이었다. 키스를 한 번 하기까지 3개월, 가슴을 만지기까지 1개월, 함께 자기까지 다시 2개월……. 그런데 이 여자와는 만나자마자 모든 게 이루어졌다. 이건 좋은 현상인가 아닌가, 쉬이 판단이 서지 않았다. 첫 출근을 한 월요일부터 화, 수, 목, 금요일까지, 여자는 철저히 사무적이었다. 단정한 차림새, 다소곳한 표정과 말투……. 그런 여자에게 이런 색다른 면모가 있을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여자는 훌러덩 옷을 벗어던졌다.
오, 이런!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화끈해도 너무 화끈하지 않은가. 숲속에서는 희미한 형체와 촉감으로만 느꼈던 여자의 몸이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흥분을 가눌 길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껴안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럼 왜 옷을…….”
나는 애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갑갑해서 그래요.”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란 말인가…….
“욕실이 어디예요?”
“수납장에 수건하고 여분의 칫솔 있어요.”
나는 손으로 욕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갔고, 나는 소파에 앉았다. 시간을 보니 두 시 사십 분이었다. 스르르 잠이 몰려왔다. 쓰러지듯 소파에 드러누웠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소파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이불을 덮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덮어준 것이리라. 침대를 보니, 그녀가 없었다. 그 사이에 자신의 집으로 가버렸나 보군, 생각하며 현관을 보니 그녀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 행거에는 그녀의 옷이 걸려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을 노크해 보았다. 아무 소리가 없었다. 욕실 문을 열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방문을 열어보았다.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몸을 옆으로 웅크린 채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발가벗은 상태로. 배와 엉덩이 부위만 이불을 덮은 채였다.
내가 사는 곳은 투룸이었다. 말이 투룸이지, 방 하나에 거실 겸 부엌이 있는 공간이었다. 거실에는 침대와 소파와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방에는 책장과 책상을 마련해 두었다. 방은 독서와 글쓰기의 공간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방에는 자주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직장에서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뒤적거리다보면 금세 밤이 깊어졌고, 다시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