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ddest thing 10

by 이룸

2차를 마시고 밖으로 나왔을 때 왕규가 나이트클럽에 가자고 했다. 나는 싫다고 했다. 내심 가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끝없이 술에 취한 채 허우적거리고만 싶었다. 그러나 그나 나나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인식이 막아섰다. 그러자 해죽거리던 그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배역을 연기하면 잘 할 것 같았다. 맨 정신일 때는 지킬 박사를, 술에 취했을 때는 하이드를.

“왜 싫은데?”

“선생님이나 저나 그런 곳에 갈 처지가 못 됩니다.”

“뭐? 내 처지가 어때서?”

그냥 아무 대꾸하지 않고 집으로 향할까, 싶은 마음이 일렁였다. 이런 말을 한들 저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차피 다음 날이면 기억도 못할 것을…….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빚도 아직 다 못 갚으셨잖아요. 나이트에 가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빚?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내가 쪼잔하게 살아야 해? 내가 그런 놈으로 보여?”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표정이 홱 굳어지며 나를 쏘아보았다. 초점 잃은 눈동자가 돋보기안경 너머로 번들거렸다.

“뭐? 꺼지라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픽, 실소를 했다. 그랬더니,

“지금 비웃냐? 내가 우습냐?”

“그게 아니라, 내일을…….”

“이 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너, 이 새끼야,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네, 잘 압니다.”

무심결에 나는 대답했다.

“까불지 마, 이 새끼야! 네까짓 게 알긴 뭘 알아!”

그는 호통을 치고 나서 멈춰 서 있는 택시로 비틀거리며 걸어가서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꺼져, 이 새끼야! 나 혼자 가면 돼!”

기분이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악의가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왕에게 꾸중을 들은 신하처럼 나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점심시간에 전날 밤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그는 역시 기억을 하지 못했다. 고개를 수그리곤 몹시도 곤혹스러워했다.

“미안하오.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을 내 스스로에게 내뱉은 거라고 생각해 주오. 결코 고 선생을 향해서가 아님을…… 이해해 주시오.”

“네, 충분히 이해합니다.”

나는 미소 지어 보였다.

*

“왕규 아저씨 좀 이상하지 않아요?”

목요일 오후에 경리 아가씨가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나는 창고 밖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휴대전화 만지작거리는 것에도 싫증이 났나 보군,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왕규는 서점으로 배본되었다가 팔리지 않아 되돌아온 책들 중에서 몇 년 묵혀 두었지만 더 이상 주문이 들어올 가망이 없는 ‘재생불능반품’들을 싣고 제지공장에 간 직후였다. 왕규와 나는 오전에 그런 책들을 추려서 트럭에 실었었다. 분기별로 한 번씩 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참으로 서글픈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책들은 수시로 주문이 들어오기 때문에 아예 서가에 정리할 필요도 없이 입구 가까이에 쌓아 두는가 하면, 어떤 책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가 재활용 종이가 되는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뭐가?”

“자신이 무슨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아요.”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 그동안 입이 근질근질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어떻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시치미를 뗐다. 그러자 경리 아가씨는 비밀을 누설하듯 신나는 눈빛이 되었다.

“자신이 왕건의 후손이래나 뭐래나. 게다가 자신이 역사에 길이 남을 시인이래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요, 자기 입으로 한두 번 말한 줄 알아요? 경민 아저씨 오기 전에는 심심하면 옆에 와 가지고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귀찮아 죽겠는데 내색하기는 뭐하고……. 처음에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을 땐 뭣도 모르고, 술 한 잔 함께 하자기에 따라갔지 뭐예요. 그랬더니 고려 왕족 얘기에 시 얘기에…… 그러다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한테, 자기의 첩이 되는 게 어떠냐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 모든 걸 다 얻을 수 있다면서……. 내 참 기가 막혀서…….”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요, 싫다고 했죠. 그랬더니 막 화를 내는 거 있죠? 땅을 치며 후회할 거라는 둥, 나중에 찾아오면 그땐 기회가 없을 거라는 둥……. 그래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다음 냅다 도망쳐 버렸죠. 근데 더 심각한 게 뭔 줄 알아요? 다음날이 되니까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는 거예요.”

나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칼칼칼, 웃음을 뿜었다.

“민정이 재미있으라고 한 소리니까 너무 노여워하지는 마.”

“아니에요, 농담이 아니라니깐요. 얼마나 진지한 얼굴로 그랬는데요. 저 뿐만이 아니에요. 알바 나온 사람들마다 붙잡고 늘 그러는걸요. 경민 아저씨가 이곳에 나타나서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몰라요. 경민 아저씨 온 이후론 저한테 다가와 쓸데없는 얘기 늘어놓지 않아서 좋아요. 이곳에서 오랫동안 일하실 거죠?”

“글쎄…….”

“그래 주세요, 네? 그리고…… 이런 얘기 제가 했다고 왕규 아저씨한테 말하면 안 돼요, 절대로. 아셨죠?”

핼핼 미소 지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리 아가씨는 다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