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ddest thing 9

by 이룸

일이 끝나면 왕규가 여지없이 술을 마시자고 했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집에 가봐야 따로 할 일도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그가 하는 얘기는 첫날에 한 얘기를 변주하는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취한 상태에서 한 얘기는 기억을 못했다. 나는 비슷한 내용의 얘기를 듣고 또 들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와 함께하는 자리가 편안해서 좋았다. 허무맹랑하긴 하지만 그는 순수했고, 계산적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하면서 꾹꾹 눌러두고 있었던 스트레스들이 지금의 증상으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작가들의 작품을 다루다 보니 지적 허영에 잔뜩 부풀어 오른 사람들, 은연 중 스스로의 수준을 지나치게 높게 자리매김하고 동료들을 아무 근거 없이 무시하거나 깔보는 사람들, 고압적인 자세로 직원들을 종 부리듯 하며 군림하는 사장이나 팀장, 팀장이 바뀔 때마다 기회주의적인 형태로 일관하는 사람들, 친한 사람끼리 편하거나 중요한 일을 독점하려 애쓰는 사람들……. 그러나 난 그런 것에 과민하게 반응하거나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다른 곳에 있었으므로. 배제하면 배제되었고,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두었다. 그러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인생이 되어버렸다.

언제부턴가, 하루 종일 인터넷을 통해 어학사전과 백과사전을 뒤적거리며 교정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더 이상 글자를 보기가 싫어졌다. 그리하여 꿈과 현실이 따로 놀았다. 꿈은 가슴속에 깊숙이 묻어둔 채로 텔레비전을 켜놓고 야구나 축구나 격투기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이런 걸 왜 썼을까 싶은 책이나 번역이 엉망진창인 책을 붙들고 씨름하다 보면 회의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자책했다. 이런 머저리 같으니, 작가를 꿈꾸면서 출판사에 들어오다니, 무슨 생각이 그리 단순해! 출판사는 작가들 뒤치다꺼리를 하는 곳에 불과하잖아! 수준 미달인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책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나무가 안쓰러웠고, 나무 앞에 엎드려 사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책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돌아오는 건 핀잔뿐이었다. 넌 네 맡은 일이나 잘해! 네가 생각하는 것과 세상이 생각하는 것은 달라! 세상이 생각하는 것은 곧 사장이 생각하는 것의 다른 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면 대개 그런 책을 쓴 사람들은 사장과 친분이 있는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거나 회사로부터 그만둠을 당한 경우, 며칠간은 의욕에 불타올랐다. 좋아, 기회는 이때다! 한국에 카프카가 재림했다는 것을 보여주마! 그러나 조금 끼적거리다가 그만두기 일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먹고살 걱정이 덮어버리고, 그러면 ‘북에디터’ 같은 곳에 들어가 구인 광고를 들여다보고, 안절부절못하며 이력서를 작성하곤 했다.

왕규와 처음 대면했을 때 나는 그를 동급으로 바라보지 않았었다. 내심 몇 단계 아래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며칠 함께 지내다 보니 왕규나 나나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허무맹랑할지언정 왕규는 여전히 꿈을 가슴속에 품은 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결혼해서 자식을 둘이나 두고 있는 상황에서.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인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술로 탕진되는 인생이 아닌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쌓인 울분을 온통 술로 해소하고 있지 않은가. 잃어버린 세계를 되찾으려 한다면서 자신만의 ‘마음의 왕국’에 갇힌 채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수요일 저녁에 술을 마실 때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레 말을 건네었다.

“근데, 그렇게 술을 자주 마시면 월급으로 다 충당이 되십니까? 빚도 아직 남아 있으시다면서…….”

그러자 그가 손을 훼훼 내저었다.

“에이, 난 그렇게 계산하면서 살기 싫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식들까지 키우려면 돈이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러자 그가 캉캉캉 웃음을 뿜었다.

“자식들이야 마누라가 다 알아서 키우니까 걱정 없어. 우리 마누라가 얼굴은 안 예뻐도 생활력 하나는 대단하거든. 떡집을 하는데 말이지, 얼마나 떡을 잘 치는지 몰라. 떡 치는 소리가 아주 죽여줘. ㅎㅎ. 돈도 나보다 훨~씬 많이 벌어. 내가 다른 복은 몰라도 여복 하나는 끝내주거든.”

그렇다면야 불행 중 다행이었다, 술만 마시면 대책 없는 낙천주의자가 되는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될지 알 순 없었지만.

“내가 왜 술을 마시는 줄 알아?”

그거야 중독이 되어서죠, 라고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았다. 내가 말없이 있자 왕규가 스스로 답했다.

“시를 쓰기 위해서야. 시는 말이야, 고통에서 나오는 거야. 편한 상태로는 결코 시가 나올 수 없어. 난 고통의 극한까지 갈 거야. 시로 끝장을 볼 거라고.”

어이구야, 시를 쓰기 위해 술을 마신다니…… 이런 사고방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