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ddset thing 12

by 이룸

“어느 날 문득 내 첫사랑이 짜잔, 하고 나타난 거였소. 게다가 나에게 친구 신청을 하지 뭐요. 친구 수락을 하고 그녀와 연락까지 하게 된 거라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요.”

“축하드립니다.”

내가 술잔을 들어 올렸고, 그가 히득히득 웃음을 뿜으며 잔을 부딪쳤다. 잔을 비우고 서로의 잔을 채워준 후 그와 나는 나란히 순대볶음을 집어먹었다.

“일 끝나자마자 달려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맨정신으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지금 이렇게 술을 마시는 거요.”

어이구야……. 왕규의 모든 길은 술로 통했다.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소, 30년 만에 첫사랑을 만난다니…….”

다시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각별한 사이셨나 봐요?”

“그녀는 별이었소. 저 멀리, 가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별이었소. 견우와 직녀의 만남보다 더 거룩하고 애잔한 만남을 우린 30년 만에 하게 되는 거라오.”

아, 이건 또 무슨 청소년기적인 감흥이란 말인가. 그러나 왕규의 눈빛은 진지하기만 했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여전히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야 할지, 망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고 해야 할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고 선생도 만나보면 알 거요. 아름답다는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여자요.”

“30년 만에 만나는데 두 분이 만나셔야죠. 저는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그러자 왕규가 다시금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나 혼자서는…… 용기가 나지 않소. 고 선생이 옆에 있어야 하오. 아아, 돈 같은 건 걱정 마시고, 내가 다 낼 테니까. 고 선생은 그냥 옆에만 있어 주시오.”

“도대체 얼마나 미인이시길래…….”

나는 해글해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미인이다 뿐이겠소? 팔방미인이라오. 노래도 잘 부르고, 마음씨도 곱고……. 황소라…… 이름도 참 예쁘오.”

말을 마치고 나서 그가 꿀룩꿀룩 소리를 내며 잔을 비웠다. 나도 잔을 비우고, 그와 나의 잔을 채웠다.

“오드리 헵번이라고 아시오?”

순대를 오물거리며 그가 말했고,

“알죠.”

순대를 집어들며 내가 대답했다.

“꼭 그렇게 생겼다오. 혹시…… 멜라니 사프카라고…… 아시오?”

“알죠. ‘The saddest thing’이라는 노래로 유명하잖아요.”

으억, 그가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켜 보였다.

“그 노래를 안단 말이오? 정말?”

자신만이 아는 소중한 것을 다른 사람도 아는 것에 대해 당혹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거야 원…… 놀랄 만한 일이 전혀 아니라고, 스티브 잡스나 타이거 우즈를 아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 노래가 왜요?”

“그녀가…… 그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불렀다오.”

그러면서 또 몽롱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으아으아아아 아으아아아아아, 아으아으아아아 아으아아아아아…….”

왕규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좌우로 깐닥깐닥 흔들면서 ‘The saddest thing’ 마지막 부분의 후렴구를 반복했다. 비슷한 연배였으면, 맛이 갔군, 맛이 갔어, 라고 말해주고픈 순간이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불행하게 사는 건 그녀와의 사랑에 실패해서요.”

갑자기 서글픈 표정이 되어 그가 말했다. 문단의 권력자들 때문에, 이성계와 정도전 때문에, 이번에는 첫사랑과의 실패 때문이란 말인가. 기가 턱 막힐 노릇이었다. 헛웃음이 새어나오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 순대볶음을 먹는 쪽으로 신경을 끌어당겼다.

“그 시절, 내 모든 시는 그녀를 향한 것이었소. 그녀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은 하늘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았소. 그녀가 웃을 때면 온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았고, 다른 사람들도 그 웃음을 공유하는 게 싫어질 정도였다오. 오로지 나 혼자만 간직하고픈 그런 웃음이었소. 백만 불짜리 웃음이었지.”

왕규의 시선은 또 다시 세상 밖을 떠돌고 있었고, 그녀의 웃음이 떠오르는지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인상을 찡그렸다.

“박동우라는 놈이 있었소. 그놈이 모든 걸 망쳐버린 거요. 2년 선배였는데……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기타도 잘 치는…… 한 마디로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었지. 그놈이 소라를 집적대기 시작했소. 과방에 가면 그놈이 기타를 치고 소라가 그 옆에서 노래를 부르고…… 그러다가 대학가요제까지 나갔지 뭐요. 물론 예선 탈락이었지. 그깟놈의 실력으로 무슨 본선에 들 리가 없었지. 허우대는 멀쩡했지만 쓰레기 같은 놈이었소. 이 여자 저 여자 집적대는 걸로 소문이 자자했었지. 그런 놈이 사랑이 뭔지 시가 뭔지 알 리가 없잖소. 그저 어디서 주워들은 달짝지근한 말로 꼬셔서 하룻밤 자는 걸 밥 먹듯 하는 놈이었소.”

왕규는 매섭게 눈을 부릅떴다. 그의 입가가 씰룩씰룩거렸다.

“아…… 어느 날, 그놈과 소라가 함께 여관에 들어가는 걸 목격했소. 아니지, 그놈이 소라를 억지로 끌고 간 거요. 소라는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지. 그걸로 내 첫사랑은 끝이 난 거요. 그놈 잘못이 크지만, 왜 소라가 술을 마시고 끌려간 것인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소. 처음부터 그런 놈에게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하는데…… 소라는 너무 순진해서 탈이었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처럼 착한 줄 알았던 거지……. 하지만 그래도 한 번의 실수는 용서할 수 있다고 마음먹었소. 그녀를 되찾는 길은 오로지 시를 써서 유명해지는 거라고,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는 것만이 그놈을 이기는 길이라 생각했소. 그놈, 그 쓰레기 같은 놈이 제 아무리 키 크고 잘 생기고 운동을 잘 해도 시가 뭔지를 모르니, 내가 시인이 되어 널리 알려지면 그녀가 내게 돌아올 거라 생각한 거요. 그 어떤 부귀영화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시 아니겠소? ……그런데, 그런 채로 이렇게 시간만 흘러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