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규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더니 술을 주욱 들이켰다. 나도 오랜만에 술잔을 비우고 그와 나의 잔을 채웠다. 순대를 오물거리던 왕규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헤벌쭉 웃어 보였다.
“언젠가 그녀가 날 찾아온 적이 있었소. 난 그때 대학교 앞에 자리한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맥주잔을 씻다가 깨진 부분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오. 피가 흘러내려 휴지로 손가락을 감고 있었는데, 그녀가 약국에 가서 소독약과 밴드를 사 가지고 와설랑 내 손을 살포시 잡고 소독약을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 주었지. 지금도 그 흔적이 손가락에 남아 있다오. 위대한 사랑의 흔적이…….”
그때 그 장면을 떠올리는 듯 왕규가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곤,
“아으아으아아아 아으아아아아아, 아으아으아아아 아으아아아아아…….”
다시금 ‘The saddest thing’의 후렴구를 감정에 도취된 채로 흥얼거렸다. ‘그놈’ 얘기를 하며 살의에 빛나던 눈빛이 어느새 천진난만한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아, 이런, 너무 내 얘기만 했잖소. 이제 고 선생의 첫사랑 애기 좀 들어봅시다.”
“저야 뭐 고등학교 때…….”
“에이, 그런 짝사랑 말고 진짜 첫사랑, 사귄 여자 말이오.”
선생님 얘기도 짝사랑 얘기 같은 데요, 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대학교 3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서 만났는데……”
얘기를 재촉하는 듯한 왕규의 눈빛 앞에서 나는 마지못해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매일 마주치다 보니 자연스레 정이 들었고 관계도 맺게 되었는데…… 저는 출판사에 입사하고 그녀는 공무원이 되어 떨어져 지내다 보니 자연히 멀어지게 되더군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진다는 말이 정말 맞더라고요. 나중에 어찌어찌 해서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같은 곳에서 일하는 남자와 만나서 사귀다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더군요.”
말을 하다 보니 왠지 남의 일을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끝이오? 그 이후론 만난 여자가 없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성욕은 어떻게 해결하시오?”
아, 한숨부터 나왔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보였다.
“가끔씩…….”
왕규가 히득히득 웃음을 흩뿌렸다. 그러더니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손으로 가슴을 매만졌다.
“이제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소.”
*
택시에서 내리니 ‘7080 가요주점’이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왕규가 지하로 난 계단을 따라 걸음을 옮겼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무대에서 한 남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장현의 ‘미련’이었다. 모니터에서는 가요 프로그램의 장면이 나오고, ‘미련’의 가사가 그 위에 새겨졌다. 무대 앞의 테이블에는 네 명의 남자와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 밖에는 손님이 없었다. 왕규와 내가 들어서자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총총거리며 다가왔다.
“이게 얼마만이야!”
여자가 화들짝 웃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왕규는 어설픈 미소를 머금은 채 쑥스러워하며 손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이번에는 나를 향하여 환한 미소를 내보였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이쪽으로 앉아.”
여자가 손짓을 했고, 왕규와 나는 여자가 가리킨 곳으로 가서 앉았다.
“술 가져올게.”
그렇게 말하고 여자가 주방으로 향했다.
오드리 헵번하고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어렸을 적엔 그럭저럭 귀엽다는 소리를 간간히 들으며 살았겠지만, 지금은 얼굴에 주름도 많아 보였고 허리에도 군살이 넉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지어 보이는 웃음 너머로 차가운 인상이 내비쳤으며,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듯한 느낌이 온몸에서 넘실거렸다. 두 귀에는 은색의 동그란 귀걸이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고, 목에는 금빛의 목걸이가 실내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손톱엔 보라색 매니큐어를, 입술에는 연두색 립스틱을 바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처연한 기분을 자아내게까지 하였다. 조금이라도 어려 보이려 무던히도 애쓰고 있구나, 싶은.
왕규는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30년 전의 모습과 달라진 형상에 실망한 건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마음이 여전히 진정이 안 되오.” 그가 의자를 끌어당기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혹 누가 들을까봐 조심스러워하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황청심환이라도 먹고 오는 건데 그랬소. 30년 전보다 더 예뻐졌지 뭐요. 어떻소, 저런 미인을 본 적이 있소?”
어이구야, 돈키호테와 둘시네아가 따로 없군.
“저 여자 분이 이곳을 운영하시는 건가요?”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녀는 이곳에서 가수요.”
가수? 이 허름한 공간에서? 아,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손님들이 술을 마실 때 가끔씩 노래도 부르는가 보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