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ddest thing 14

by 이룸

여자가 맥주와 과일안주와 마른안주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왕규의 옆에 앉았다. 그때 ‘미련’이 끝났고,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도 앞쪽의 남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며 박수를 쳤다. ‘미련’을 불렀던 남자는 자리에 앉고 다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위로 올랐다. 그리고 남진의 ‘둥지’가 시작되었다. 무대 위의 남자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움직였고, 그에 따라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뒤섞이며 소란스러워졌다.

여자가 왕규와 나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었고, 왕규가 여자의 잔에 조심스럽게 천천히 술을 따랐다. 여자가 술잔을 들어 올렸고, 왕규와 나는 잔을 부딪쳤다.

여자가 몸을 가까이 하며 왕규의 귀에 대고 뭐라고 하자, 왕규가 흠칫 놀라며 몸을 반대편으로 살짝 기울였다. 어쩜 저럴 수 있을까 싶었다. 나이트클럽에서는 처음 보는 여자와 아무렇지 않게 찰싹 달라붙더니, 첫사랑이라는 여자 앞에서는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있지 않은가. 왕규가 여자를 향해 뭐라고 하자, 잘 안 들리는지 여자가 귀를 왕규의 입 가까이로 들이댔고, 그러자 왕규는 또 흠칫한 뒤 입을 열었다.

나에게는 실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무대에서는 남자들이 번갈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둥지’가 끝나자, 윤수일의 ‘황홀한 고백’과 나훈아의 ‘잡초’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는 무대를 바라보다가 왕규와 여자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바라보다가를 반복했다. 왕규와 여자의 모양새를 볼작시면, 여자는 강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윽박지르듯 쏟아붓고 있었고, 왕규는 의기소침한 채 자신 없이 우물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난 지금 여기서 도대체 뭐하고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물결쳤다. ‘잡초’가 끝나자 남자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바보야, 우리가 무슨 20대 청춘이니?”

실내가 조용해지자 왕규의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여자의 말소리는 내 귀에 들려왔다.

“소라 씨!”

앞쪽에서 누군가 여자를 불렀다. 그러자 여자가 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왕규는 시무룩해져 있었다. 어떤 얘기가 오고간 것인지는 몰라도 잔뜩 기가 죽은 기색만큼은 역력했다. 여자가 사라지자 그동안 참고 마시지 않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자는 한 남자와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한 모양새로 보아 그 남자가 이곳의 사장인 모양이었다. 다른 남자들은 사장의 친구들인 듯했다.

여자가 다시 이쪽으로 왔고,

“노래 안 부를 거야?”

왕규에게 물었다. 왕규는 손을 내저었다.

“좀 있다가…….”

“노래하세요.”

여자가 이번에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마지못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여자가 다시 사장에게로 갔고, 사장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 무대로 올라섰다. 리모컨으로 버튼을 누르자 민해경의 ‘보고 싶은 얼굴’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여자가 리듬에 맞춰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

고개를 숙인 채 있던 왕규는 여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무대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입을 헤 벌린 채 쳐다보았다. 사춘기의 청소년이 아이돌 가수를 흠모하며 바라보는 모습과 흡사했다. 그러더니 또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이.

왕규가 잔을 비우면 나는 그의 잔을 채워주었고, 맥주를 한 모금씩 마시곤 과일 조각이나 땅콩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왕규는 안주에는 손을 대지 않고 술만 마셔댔다.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나는 말했다. 왕규가 못 알아들었는지 테이블에 바짝 다가앉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조금만 더 있어 주시오. 마음이 많이 괴롭소.”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그러곤 주먹을 불끈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소라는 멋진 집에서 멋진 남자와 함께 멋진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이게 다 박동우, 그놈 때문이오. 그놈이 소라의 인생을 망쳐놓은 거요. 얘기를 들어 보니, 내 예상이 맞았소. 그놈한테 겁탈당한 거나 마찬가지였소. 그놈한테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온갖 고생을 했습디다. 가수가 되기 위해 가요제에도 나가 보고 연예 기획사에도 들락거렸는데, 이 세상엔 박동우 같은 놈들 천지라고 합디다. 띄워주는 대가로 항시 몸뚱이를 요구하는 거였소. 그래, 더러워서 못해먹겠어서 다 때려치우고 착실한 남자 만나 결혼해서 애를 낳았는데, 무슨 희귀병인가에 걸려 애가 죽었다지 뭐요. 이혼하고 화장품 가게를 차렸는데, 그것도 잘 안 돼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잘 아는 오빠가 이곳에서 일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해서 지금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거라고 합디다. 어렵사리 가수의 꿈을 다시 이어갈 수 있게 된 거요.”

말을 마치자 왕규는 침울한 얼굴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디까지가 들은 내용이고, 어디까지가 왕규의 주관이 들어가 각색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자는 ‘보고 싶은 얼굴’에 이어 주연의 ‘갈망’을 부르고 있었다. 왕규는 애처로운 눈빛이 되어 여자를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30년 만에 고백을 했소, 널 사랑한다고. 결혼한 상태지만, 소라 너를 위해서라면 이혼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그랬더니 소라가 그럽디다. 10억이 있으면 너에게 가겠다고. 아, 기가 푹 꺾이고 말았소. 10억은커녕 1억도 없는데, 10억이라니……. 그런 말 한다고 소라를 욕하면 안 되오. 그런 말할 자격이 충분한 여자니까. 암, 그렇고말고. 10억이 다 뭐요, 100억의 가치가 있는 여자라오. 내가 시인으로 성공만 했으면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졌을 현실인데…… 안타까울 따름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