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뿜어져 나올 뻔했다. 시인과 10억이라니……. 웃음을 막기 위해 나는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왕규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왜 내가 꿈꾸는 세상은 항상 다른 곳에 있는지 모르겠소.”
“그거야 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나는 오랜만에 한 마디 했다.
“고 선생도 그렇소?”
“그럼요. 저라고 뭐 이렇게 사는 게 만족스럽겠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욕심을 버리는 거겠죠.”
그러자 왕규가 손을 훼훼 내저었다.
“에이, 그건 아니오. 그건 다 권력자들이 만든 궤변에 불과하오. 고분고분 말 잘 듣게 하려고, 그래서 자신들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수작에 불과하오.”
“그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거 같은데…….”
나는 자신 없이 우물거렸다.
“세상에 두 종류의 삶만 있다고 칩시다. 남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 모험하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사는 삶과, 업적을 이루든 해악을 끼치든 모험하는 삶 중에서 뭐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오?”
“글쎄요…… 어려운 물음이네요. 그래도 둘 중 하나를 꼭 선택해야 한다면…… 아무래도 모험하는 삶을 선택해야겠는데요.”
“그렇소, 그래야 하오.”
“그런데 그 모험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아, 그런 건 논외로 칩시다. 깊이 파고 들어가면 한이 없으니까. ……난 이제부터 로또에 투자할 거요.”
칼칼칼, 웃음이 뿜어져 나오고 말았다. 이건 또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실컷 철학적인 물음을 던져 놓고선 그 귀결점이 로또라니.
“그건 투자가 아니라 돈을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일 텐데요.”
“웃을 일이 아니오.”
꿀룩꿀룩 술을 넘긴 후 왕규가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 보시오. 로또야말로 가장 정직한 거요. 다른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자리를 선점한 권력자들의 입맛에 비위를 맞춰야 하지만, 로또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소.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평등하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니 말이오.”
하아,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어떻게 하여 저런 식의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하기만 했다. 그의 뇌를 해부하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이제 희망이 생겼소. 한 달이 걸릴 지 두 달이 걸릴 진 모르겠지만, 첫사랑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소. 이게 다 고 선생 덕분이오. 고 선생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말끔하게 정리가 되었소 그려. 로또에 당첨되면 10프로, 아니 20프로를 고 선생에게 떼어주겠소.”
말을 마친 왕규가 크악크악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노래를 합시다.”
드디어 술기운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무대에서는 여자가 몸을 위아래로 움직이고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이재영의 ‘유혹’을 부르고 있었다. 왕규는 무대 앞으로 가서 잠시 여자를 멍하니 지켜보는가 싶더니, 이내 양손을 들어 올리고 손가락으로 천장을 찔러대는 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노래의 박자와는 전혀 맞지 않는 동작이었다. 여자가, 어머, 웬일이니, 하는 표정을 지으며 느슨해진 몸짓으로 노래를 이어갔고, 무대 앞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도, 참, 별꼴이네, 하는 표정으로 왕규를 쳐다보았다.
그냥 몰래 나가 버릴까, 싶은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건 도리가 아닐 것 같아 나는 자리에 앉아 따분한 시간을 견뎌나갔다. 노래를 하고 싶은 마음 따윈 들지 않았다, 전혀.
‘유혹’이 끝나자 왕규가 여자에게 뭐라고 말했는데, 잘 안 들렸는지 여자가 왕규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왕규가 크게 소리쳤다. “쌔드 띵.”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가 피식 웃음 지으며, 아, 쌔디스트 씽, 이라고 말하는 입 모양이 보였다.
여자는 난처해하다가 사장에게로 향했고, “사장님, 멜라니 사프카의 ‘The saddest thing’ 불러도 돼요?” 정도의 말을 고분고분한 태도로 묻는 것 같았다. 그러자 사장은 “뭐라고?” 라고 되묻는 것 같았고, 그러자 여자가 노래책을 들고 와서 펼쳐 보이곤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왕규에게로 가서 양팔을 들어 X표시를 하며 불가하다는 입장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자 왕규는 “왜?” 라고 물었을 것이고, 여자는, “사장님이 안 된다고 해.” 라고 대답했으리라. 그러자 왕규가 폭발했다. 사장에게로 몸을 홱 돌리는가 싶더니,
“네가 뭔데 ‘쌔드 띵’을 못 부르게 해!” 하고 소리 질렀다.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왕규에게로 다가갔다. 왜소한 몸집의 왕규와 꽤나 단단해 보이는 체구의 사장이 대비되어 보였다. 곧 싸움이라도 벌어질 것 같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무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장과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이 화를 누그러뜨리려 애쓰며 조곤조곤 설명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함께 있는 친구들을 가리켜 보이며 뭐라고 말했다. 여기 다른 분들도 계시니까 다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노래를 들읍시다, 정도의 말이었으리라, 아마도. 그때였다.
“너, 이 새끼, 박동우지?”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사장을 가리키며 왕규가 외쳤다. 사장은 어리둥절해하며 여자를 향해, 박동우가 누구야?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왕규에게로 다가가 팔을 붙들며,
“너 많이 취한 것 같다. 자리에 들어가서 앉자.” 했다.
나도 왕규의 다른쪽 팔을 붙들며,
“이제 그만 나가시게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