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절망의 이중주 #3

by 이룸

긍정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치료를 끝마치고 나서 영우는 재활훈련에 성실히 임했다. 그러나 프로팀의 1군에서는 불러주는 곳이 없었고, 결국 2군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연봉에서나 처우에서나 시설에서나 열악하기만 했다. 관중석에도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다시금 이를 악물고 노력 또 노력하여 1군으로 올라가는 것만이 유일무이한 과제가 되었다.


최선을 다해서 경기에 임하고, 경기가 없는 날엔 꾸준히 기초체력 훈련을 하고 스윙 연습에 수비 연습에 몰두했다. 하지만 1년이 다 되도록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다.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맥이 풀렸다. 줄곧 한 가지 길만 보고 왔는데 갑자기 길이 끊기자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허허벌판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찌감치 내 말을 들었으면…… 이렇게까지 아픔을 키울…… 필요가 없었잖아.” 절망이 나타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다 끝났어. ……이제 너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야.”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영우는 자동차를 몰고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도 없이, 그저 바퀴가 구르는 대로 다녔다. 바다를 만나면 잠시 바닷가를 거닐었고, 산을 만나면 잠시 산을 올랐다. 밤이 되면 여관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곤 잠을 청했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은 공허하기만 했고, 늘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절벽 위에서 떨어질 것인가, 목을 맬 것인가, 욕조에 물을 채우고서 손목을 그을 것인가…….


어느 작은 읍내를 지나고 있는데, 초등학교가 눈에 띄었고,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영우는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꺾었다. 교문 옆에 자리한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려 천천히 걷다가 건물 앞의 벤치에 앉았다. 그런 채로 망연히 아이들이 야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흙바닥에서, 헬멧도 쓰지 않고 글러브도 끼지 않은 채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갖춘 것이라곤 놀이에 대한 즐거움 하나뿐이었다.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보며 영우는 슬며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웃어본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 하고 영우는 탄식했다. 나는 그동안 꿈에 짓눌린 채 유예된 삶을 살아왔구나, 크게 되겠다는 욕심에만 사로잡혀 소소한 즐거움을 잊고 살아왔구나, 크게 되고 나면 그동안 밀쳐두었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보상 받으리라는 생각으로 살아왔구나, 꿈을 이루지 못하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붙들린 채……. 그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운 삶을 향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바람에 영우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서 떨어져 나왔다.


“아저씨, 타자가 1루로 뛰는데 수비가 공으로 타자를 맞히면 그게 아웃인가요?” 키 작은 아이가 물었다.


“세이프지.” 영우는 웃음을 흘렸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키 작은 아이가 키 큰 아이를 향해 을러댔다.


“우리 동네에서는 그거 아웃인데…….” 키 큰 아이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영우를 바라보았다. “아저씨가 뭐 심판이에요?”


“심판은 아니지만 야구는 오랫동안 했지.” 영우는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야구선수였어요?” 키 작은 아이가 놀라는 표정을 내보였다. “어떤 팀인데요?”


영우는 프로구단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2군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모여 섰던 아이들이 와, 하고 합창을 했다.


“선생님! 이소희 선생님!” 통통한 아이가 소리치며 건물 쪽으로 달려가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아저씨가 야구선수였대요.” 하고 말했다.


“어, 그래?” 이소희 선생님이라고 불린 여자가 영우와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분홍빛 원피스를 입고 환하게 미소를 머금은 모습을 보며 영우는 꼼짝없이 사로잡혔다. 한 송이 꽃이 걸어온다, 는 문장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다가와서 인사를 했고,


“안녕하세요.” 영우도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이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우르르 몰려갔다.


“어떻게 여긴…… 자리를 알아보러 오신 건가요?” 여자가 물었다.


“자리…… 라뇨?” 영우는 영문을 몰라 하며 되물었다.


“그럼 어떻게……?”


“아, 저는 그냥 차 몰고 지나가다가……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고 있기에 잠시 구경 좀 하려고…….”


“그냥 우연히 들르신 거예요?”


“네.”


“야구선수인 건 맞구요?”


“지금은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는…… 선수생활을 했었죠.”


“그럼 마침 잘 되었네요. 그렇잖아도 다음 학기부터 이곳에 야구부를 개설할 예정이거든요. 아이들이 얼마나 기대에 부풀어 있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여자가 아이들을 바라보며 향기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 앞에서 영우는 왠지 자신도 초등학생이 되어 선생님을 마주한 것처럼 수줍은 느낌에 휩싸였다. “그렇다면 혹시…… 야구부 맡아서 아이들 지도할 의향이 있으신가요?”


“이거 너무 갑작스러워서…….” 영우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잠시만요.” 여자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몇 발자국 걸어가서 통화를 했다. 그러곤 다시 영우에게로 다가왔다.


“교장 선생님이 지금 뵐 수 있다고 하네요. 같이 가시죠.”


여자가 건물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영우는 자석에 이끌리듯 여자의 뒤를 따랐다.


오랜만에 희망이 나타나 소곤거렸다. “진정한 희망은 사랑으로 시작되지.”


“그게 무슨 말이야?” 영우가 묻자, 희망은 찡긋 윙크만 날렸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지만, 내일 다시 해가 떠오르리라는 것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그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영우는 새삼스레 느끼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