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모녀의 수다 한판
“엄마, 진짜… 그 남자랑 또 어디 간 거야?”
초롱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영란은 한 모금 커피를 마시고 입술을 닦았다.
“어딜 가긴. 첫사랑 찾으러. 멋지지 않냐?”
“와… 60살짜리 여자가 첫사랑 찾으러 다닌다는 얘긴 처음 들어봤어. 요즘 애들도 그렇게 안 해.”
영란은 코웃음을 쳤다.
“야, 너네가 못해서 그런 거야. 우리는 했어, 사랑도, 싸움도, 질투도, 다. 그냥 밍숭맹숭 연애질이 아니라, 진짜 죽고 못 사는 그런 거.”
“하긴… 엄마 인생 보면 그냥 ‘드라마’지.”
초롱이가 피식 웃자, 영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엄마 팔자는 좀 세지. 근데 말이야, 내가 그 놈들 다 직접 보고 ‘이제 됐다’는 말 듣고 싶었어.”
“그래서 지금 몇 명 만났어?”
“두 명. 세 번째 찾는 놈이 문제야. 어디로 튀었는지 흔적도 없어.”
“도망간 거 아냐? 엄마 무서워서.”
“야!”
영란이 손바닥으로 초롱이 이마를 살짝 튕겼다.
“네 엄마가 얼마나 상냥한데.”
초롱이는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 그 김대식 아저씨는 어때?”
“왜?”
“그냥… 그런 사람도 보기 드물긴 해. 매일 아침마다 와서 엄마 기다리고, 밥 사주고, 운전기사처럼 따라다니고.”
“응, 그러니까 좀 이상하지 않냐?”
“왜? 너무 잘해서?”
“그렇다니까. 그런 사람이 왜 나한테 이러는지… 아직도 납득이 안 가.”
초롱이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엄마가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지. 사람들이 엄마 무섭다고 해도, 난 알거든. 엄마 진짜 의리 있고, 약한 사람 보면 못 지나치잖아.”
“에이, 무슨 감성팔이야.”
영란이 눈을 흘기며 말했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잠시 후, 초롱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근데 엄마, 솔직히… 대식 아저씨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
“왜?”
“그 사람이랑 엄마가 옆에 있을 때… 엄마가 좀 편안해 보여. 예전에는 없던 얼굴이야.”
영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좀 더 데리고 다녀볼까?”
한참을 이야기하는 중에 영란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어 영란아 찾았어!!”
“병진이? 걔 요즘 ○○건축 다닌다더라. 내 사촌이 그 건물에서 일하는데 봤다나 뭐라나.”
카페 구석에 앉아 있던 영란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짜야? 확실해?”
“아 몰라. 사람 얼굴 잘 기억 못 하는데, 이름은 맞다더라고. 주병진.”
그 말을 들은 최영란, 눈 한번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바로 전화했다.
“대식 씨, 차 빼요. ○○건축 사무소 간다.”
건축사무소는 서울 외곽, 번잡한 신도시 한복판 고층 빌딩 9층에 있었다.
깔끔한 복장으로 올라온 영란, 로비에서 직원에게 물었다.
“여기 주병진 씨 있어요?”
직원은 명찰을 살짝 당기며 물었다.
“어느 팀이신가요?”
“팀은 모르고요. 오래된 친구인데, 여기 다닌다고 해서요.”
직원이 검색을 시작했고, 영란은 기다리는 동안 로비 벽에 붙은 회사 사진 속을 찬찬히 훑었다.
눈빛이 매서워졌다.
‘설마 여기서 잘 살고 있던 거면 진짜… 나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그 새끼, 20살 때 나를 어떻게 버렸는데.
그 순간, 직원이 말했다.
“아… 아마 착오신 것 같아요. 저희 쪽엔 그런 이름이 없네요.”
“확실해요? 주병진, 쉰아홉은 됐을 거예요.”
“혹시 이 분 말씀하시는 거예요?”
직원이 가져온 인사기록엔
주병진(56세)
강원도 원주 출신.
건축전공.
“어이 C…”
영란은 말끝을 삼켰다.
“아니네. 이름만 같네. 얼굴도 달라.”
옆에 조용히 따라온 김대식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 그럼 그냥 다른 사람… 인가요?”
“그럼 내가 여기까지 왜 왔겠어요?!”
영란은 들고 있던 핸드백을 의자에 ‘쿵’ 내려놨다.
그날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 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더니, 방금 전 소문 전해준 친구에게 다시 전화했다.
“야, 너 지금 다시 확인해 봐. 그 주병진 아니야. 이름만 같아. 얼굴도 다르고, 출신지도 달라.”
김대식은 뒷짐을 지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 혹시, 주병진 씨는 어떤 분이었나요?”
영란은 고개를 휙 돌렸다.
“묻지 마. 아직 안 풀렸어. 아직도 그놈 이름만 들으면 목덜미가 확 달아올라.”
“죄송합니다.”
“뭘 또 죄송해. 당신 잘못도 아닌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영란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로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괜히 시간만 버렸네.”
“그래도… 같이 오니까 다행이죠. 혼자 오셨으면 진짜 열 뻗쳤을 텐데.”
김대식이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웃었다.
“뭐야, 지금 웃음이 나와?”
“아니요… 그냥… 좀 다정하게 받아주시길래… 다행이다 싶어서요.”
“내가 언제 다정했냐?”
“오늘이요.”
“하… 이 사람 장난이 늘었네.”
영란은 그래도 미소를 억지로 참으려는 듯 입꼬리를 움찔했다.
그러나 그 미소도 잠시,
그녀의 눈빛은 다시 멀어졌다.
'그 자식… 어디서 뭐 하고 살까. 사람 얼굴 피하며 사는 건 아닐까. 아니, 피할 얼굴도 없다고 생각하고 살지도.'
어디선가, 주병진은
자기 인생이 평탄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란은 반드시,
그를 마주하고,
그날 그 말을 묻고 싶었다.
“왜 그랬냐, 병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