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진 만나러 가기 전 – 영란의 집 앞에서]
“초롱아!!, 어머니 계시니?”
“어, 김대식 아저씨! 오셨어요? 어머니는 방에서 뭐 챙기고 계세요.”
김대식은 현관 앞에서 운동화를 벗으며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크고 넓은 아늑한 거실.
몇 장의 액자 사진과 깔끔하게 정돈된 잡지들 그리고 그녀가 그린 그림들.
그러나 그 안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임초롱은 컵에 차를 따라주며 그를 바라봤다.
“아저씨, 요즘 엄마 따라다니는 거… 힘드시죠?”
김대식은 헛기침을 하며 멋쩍게 웃었다.
“네? 아, 뭐… 뭐랄까, 재밌어. 예측 불가한 여행이야.”
초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엄마가 말은 안 해도요,
지금 그 여정… 혼자서는 절대 못 했을 거예요.”
“……그런가?”
“네. 아저씨 아니었으면,
이 여정… 그냥 마음속에서 끝났을지도 몰라요.”
김대식은 고개를 떨구었다가, 초롱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초롱아… 이 여정이 끝나면, 어머니가 좀 달라질 거라 생각하니?”
초롱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엄마는 늘 강한 척하잖아요.
근데 전 알아요. 엄마 안엔…
아직도 울지 못한 순간들이 많다는 거.”
“그래서… 이번엔 울게 해주고 싶어요.
미련 없이,
지금이라는 시간에 설 수 있도록.”
그 말을 들은 김대식은 살짝 눈가가 젖었다.
그 순간, 영란의 방에서 문이 열렸다.
“뭐 해? 출발 안 하고.”
최영란이 멋쩍게 말하며 가방을 메고 나왔다.
김대식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준비 끝났습니다. 사모님 오늘도… 완벽히 대기 중입니다.”
임초롱은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저씨, 엄마 울게 하지 말고… 그냥 옆에 있어 주세요.
그거면 돼요.”
둘은 차에 탑승하고 2번째 사랑을 찾기 위해 시동을 건다.
“다음은... 김철진이라는 사람입니다.”
운전석에 앉은 김대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운전대를 잡은 지 벌써 사흘째.
영란이 한 명씩 과거의 남자들을 만나겠다고 선언한 뒤부터, 그는 말없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조금 특별했어요?”
“특별했지.
말을 잘했고, 시를 썼고... 날 지켜본다는 느낌이 강했어.
근데 난 그런 거 싫었거든.”
“싫었다고요?”
대식은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응. 난… 그런 거 불편했어.
그 시절엔 ‘사랑’ 같은 말보다 ‘우리 편’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녀는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1985년, 서울의 어느 공립고등학교.
가을 냄새가 복도 창문 틈새로 밀려들던 그 시절.
“야, 걔 또 쳐다본다.”
옥상에서 컵라면을 먹던 미향이 삼반 창문을 힐끔 가리켰다.
그 안쪽, 어깨를 조금 움츠린 채 앉아 있던 남학생—김철진이었다.
최영란은 국물 한 숟가락을 뜨며 건조하게 말했다.
“쳐다보게 둬. 눈깔 뽑을 거 아니면.”
“걔 시 쓴대. 문학부. 뭔가 좀 감수성 있어 보이긴 하더라.”
“시?”
영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얼마나 센 시를 쓰는지 한 번 보자고.”
며칠 후, 그녀는 자기 책상 서랍에서 낯선 봉투를 발견했다.
하늘색 줄무늬가 있는 문방구 표지봉투였다.
안에는 반듯한 글씨로 적힌 시 한 편이 들어 있었다.
“나는 말 대신 종이에 묻고 싶었다.
너를 볼 때마다 입이 얼어붙어서
단어들이 도망쳤거든.”
그녀는 무심히 접어 책상 깊숙이 넣었다.
‘이 시점에서 고백이라니, 용기는 있네.’
하지만 이상하게, 시는 매일 다른 방식으로 그녀에게 도착했다.
가방 안, 체육복 주머니, 심지어 교과서 사이.
그 시절의 고백은 ‘사랑해’라는 말 대신
‘조금씩 다가오는 감정의 조각’이었고,
그 조각을 영란은 점점 외면할 수 없게 됐다.
점심시간.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김철진.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수첩을 떨어뜨렸다.
영란은 수첩을 주워 들었다.
“시 쓰냐?”
“어… 네, 네…”
“네? 친구끼리 말 놓고 해 맞기 싫으면”
“근데 이거 내 얘기야?”
“…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녀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럼 맞다는 거네.”
“…….”
“다음부턴 몰래 넣지 말고, 내 앞에서 읽어. 알았어?”
그 말에 김철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러면 우리 ‘7 공주’가… 시 낭송회 열어줄지도 몰라.”
그 말은 농담 같았지만,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었다.
‘쟤는… 진짜 사람 하나 조질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김철진은,
최영란에게 졸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비 오는 날, 빈 교실에서
김철진은 떨리는 손으로 시를 낭독했다.
영란은 팔짱을 낀 채 창가에 기대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너를 무서워하지만
나는 너를 아프다,라고 부르고 싶다.
너는 자꾸 혼자 있는 걸 선택하지만
나는 그 혼자를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사랑이라고 믿는다.”_
낭독이 끝나고, 영란의 친구들은 김철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영란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
“… 괜찮네.
근데 다음엔 목소리 좀 더 키워.
겁쟁이 시인 소문나겠어.”
그 이후, 둘은 자주 마주쳤다.
하지만 가까워지진 않았다.
언제나 김철진은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고,
영란은 그런 시선이 싫지 않으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왜냐하면 그 시절 그녀는
사랑보다 의리, 감정보다 기세, 고백보다 눈치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7 공주’의 리더는 흔들리는 감정을 들키지 않아야 했고,
무너지지 않아야 했고,
울지 않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학부 발표회.
김철진은 단상에 올라
마지막으로 그녀를 위한 시를 읽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으려 매일 싸웠다.
그게 나의 가장 오래된 시였다.”
그는 무대에서 내려오며
한 번도 영란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게 그의 마지막 용기였고,
그녀의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날 이후, 김철진은 전학을 갔다.
며칠 후,
영란의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 마지막 쪽지.
“너를 기다리는 일이
내 인생에서 가장
무기력하고, 가장 뜨거웠던 날들이었어.”
그녀는 그것을 쪽지 상자에 넣고,
마음 깊숙이 봉인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다시는 누군가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30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다시 그를 만나러 간다.
시도 없이,
쪽지도 없이,
말로 직접 말하기 위해서.
[현재 – 김철진의 동네]
“이 근처 골목길에 산다고 했어.
도박장 드나드는 사람들하고 얽혀 있다는 말도 들었고…”
김대식은 조심스럽게 차를 세웠다.
“영란 씨. 지금 만나러 가는 거... 괜찮겠어요?”
“괜찮을 리가 없지.
근데 난, 그걸 감당하러 가는 거야.”
좁은 골목길 끝에 있는 허름한 포차.
낮인데도 마치 밤처럼 어두운 그 안,
비닐 문을 젖히고 들어간 그곳에
김철진은 있었다.
구겨진 셔츠, 낡은 모자,
그리고 잃은 듯한 눈빛.
하지만 그는 여전히 수첩을 들고 있었다.
“김철진.”
그녀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와.
그 이름,
이 세상에서 네가 아니면 못 부를 줄 알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담배를 피우고,
맥주 캔을 탁 열었다.
“왜 왔냐.
내 시가 그리웠냐.”
그는 조롱하듯 말했다.
영란은 흔들리지 않았다.
“너한테 빚이 있었어.”
“빚?”
“그때, 네가 나한테 줬던 쪽지들.
그 시들,
한 번도 답장을 못 했잖아.”
그 말에, 김철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나는… 그 시절,
‘사랑’이라는 말이 제일 싫었어.
그 말 한마디에 사람 하나 바보 되기도 하고,
우정 하나 깨지기도 하거든.”
“… 알아.
그래서 너한텐 시로만 말했지.”
“근데 이제는 말할 수 있어.”
영란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 너 좋아했어.
근데 표현하는 법을 몰랐어.
그래서 도망쳤어.
그게 다야.”
조용했다.
김철진은 눈을 감았다.
“…그 말,
스무 살 때 들었으면
시 한 편으로는 부족했을 거다.”
그가 처음으로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난… 네가 알던 그 애 아니야.
도박에 돈도 날리고,
사람 몇 번 팔아먹고,
시 따윈… 이제 쓰지 않아.”
영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됐네.
이제 나도 도망 안 치니까.”
김철진의 순수했던 모습들은 도박에 물들어있었고, 그 시절 김철진은 수첩과 팬이
한 몸이었다면 이제는 화투패와 코인이 그와 함께 했다.
“야 김철진 너는 이렇게 사는 거 안 어울리니까. 다시 시 나 써 돈 못 벌어도
너는 그렇게 살 때 가장 빛이 났어”
그 말은 들은 김철진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다음 패를 기다리며 담배를 물었다.
“야 나간다 마중은 필요 없다.”
김철진과 최영란은 그렇게 끝이 났고 말할 수 없는 생각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차 안 – 시끄러운 침묵, 그리고 피식 한숨]
차 문을 쾅 닫고 조수석에 앉은 최영란.
김대식은 백미러를 슬쩍 확인하고, 아무 말 없이 조심스럽게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7초 만에 이불 걷듯 말을 걷어냈다.
“어우... 저, 그... 뭐랄까.
오늘 그분, 시 안 쓰시게 생기셨던데요?”
“... 크게 맞고 싶냐?”
영란은 고개도 안 돌린 채 말하며 구두를 벗었다.
김대식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 그냥요.
중학교 때 첫사랑은 술에 절여져 있고,
고등학교 때 편지사랑은 도박에 절여져 있고...”
“이다음엔 된장에 절여진 놈 만나겠지 뭐.”
“그럼 저는 된장찌개인가요? 계속 끓고 있잖아요, 옆에서.”
영란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대식을 빤히 봤다.
“야, 너 요즘 좀 건방져졌다?”
“저는 항상 건방졌습니다.
다만… 요즘엔 자신감이 붙었죠.”
“아놔, 진짜.
웃기려고 왔냐? 감정에 집중 못 하겠잖아.”
“감정이 너무 집중되면 오히려 길 잃어요.
가끔은… 웃는 것도 방향 잡기죠.”
영란은 잠시 그 말을 곱씹더니 피식 웃었다.
“그 시절의 나는 말이야,
사람 좋아해 놓고도 한 번도 표현 못 했어.
왜냐면 그땐 사랑보다 ‘의리’가 더 중요했거든.”
“지금은요?”
김대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은… 그냥 옆에 있는 사람한테 뭐라도 해야겠다 싶지.”
“그럼... 전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그건 니 하기 나름이지.
근데 일단, 다음 목적지 가기 전에 커피는 네가 사.”
“예, 기사님 커피 바로 가겠습니다.
근데, 한 마디만 해도 돼요?”
“뭔데.”
“오늘... 진짜 잘하셨어요.
그 말 꺼낸 거— ‘나도 너 좋아했어.’
그거, 쉬운 말 아니었을 거잖아요.”
영란은 잠깐 말없이 창밖을 봤다.
해가 기울며 건물 옆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한참 걸렸지, 그 말하는 데까지.”
“근데 했잖아요.”
“그래. 이젠… 됐지, 뭐.”
그녀는 조용히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았다.
“대식아.”
“네?”
“넌 계속 옆에 있을 거야?”
김대식은 그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한참을 생각하다 대답했다.
“당연히요. 제가 딴 데 가도 되나요?”
“어우, 재수 없어.
근데… 싫진 않네.”
김대식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오늘도 영란 씨한테 칭찬 하나 얻었다. 대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