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영 환
그렇게 김대식과 최영란은 찾을지도 못찾을지도 모르는
그녀 의 옛 사랑 들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한참을 달리던중 김대식이 이야기를 꺼냈다.
“영란씨 그런데 박영환 이라는 사람은 언제 만났어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중학교 때였어.
눈만 마주쳐도 숨 막히고, 손 한 번 못 잡고,
말 한 마디가 며칠을 흔들던 시절.”
“그게 첫사랑인가요?”
“그땐 몰랐지. 근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 애를 좋아했더라.”
그렇게 둘은 그녀가 다녔던 중학교근처에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서울 근교의 오래된 동네.
1980년대 풍경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골목을 지나며,
최영란은 멈춰 섰다.
벽돌 담장이 낮고, 잡초가 자라난 길목.
오래전 학교였던 자리엔 지금은 조그만
복지센터가 들어서 있었다.
“여기였어. 우리 학교 운동장. 여름엔 먼지 날리고,
겨울엔 언 땅에 넘어져도 그냥 웃었어.”
김대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섰다.
그는 이번에도 빠짐없이 따라왔다.
어색하게 한 발 떨어져 걷던 그는,
이제 영란의 곁에 자연스럽게 있었다.
“아 그런데 그사람은 어떻게 만났어요?”
1981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뺨에 흐르는 땀이 목덜미까지 타고 흘렀던 날.
햇볕이 운동장을 땡볕처럼 달구고,
교실 안마저 숨이 막히게 더웠던 그때.
“야, 박영환!”
쉬는 시간, 영란은 혼자 책상에 앉아
하얀 손수건 위에 종이접기를 접고 있었다.
새하얀 손수건.
가운데 접힌 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접은 작은 종이학이 세 마리.
손끝은 익숙했지만 마음은 어디론가 떠 있는 듯한 오후였다.
그런데 갑자기 교실 문이 벌컥 열리고,
땀범벅이 된 옆반 박영환이 헉헉대며 달려왔다.
그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 급히 물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나… 물 좀…”
말도 제대로 못 잇고 그의 얼굴이 빨갰다.
옷도 흐트러져 있었고, 머리는 흠뻑 젖어 있었다.
영란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가방을 뒤적여,
조심스레 물병을 꺼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둘의 손끝이 살짝 닿았다.
영환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홱 돌리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교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가 사라진 자리엔 운동화에서 흘러나온 먼지,
그리고 아직도 따뜻한 손끝의 감촉만이 남아 있었다.
영란은 가만히 앉아,
자신의 물병을 손에 쥔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별 것도 아닌 순간이었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고,
그저 물 한 병을 건넸을 뿐인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뜨겁고, 뭔가 간지럽고,
가슴 속 어딘가에서 부풀어 오르는 이상한 감정.
그날 저녁.
영란은 처음으로 일기장에 누군가의 이름을 썼다.
“박영환.
오늘 내 물병을 마신 남자애.”
그리고 그날부터,
영환은 쉬는 시간마다 그녀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야, 너네 반은 왜 이렇게 조용하냐?”
“너 왜 점심시간엔 혼자 앉아 있어?”
딱히 말이 재밌지도 않았고, 질문도 엉뚱했다.
하지만 그는 늘 어색하게 장난을 걸었다.
자기 책상에 앉았다가 슬그머니
영란 책상 쪽으로 와서 엉덩이를 붙이곤,
괜히 책을 뒤적이며 “이건 뭐야?”
“이거 네가 그린 거야?” 하며 말을 붙였다.
영란은 그런 영환이 싫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조금 좋았다.
아니, 사실은 많이 좋았다.
하지만, 그 시절엔
‘좋아한다’는 말이 마치 금기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너무 커다란 일이었고,
그래서 너무나 두려운 말이었다.
둘 다 어린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웠고,
그만큼 더 조심스러웠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있음에도,
단 한 번도 눈을 맞추고 진심을 꺼낸 적은 없었다.
가끔 눈이 마주칠 때면,
둘 다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나면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다음 날 또 만나고 싶었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으며,
그가 쓴 필기체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어느새,
졸업식 날이 다가왔다.
전교생이 울고 웃는 그 날.
풍선이 교정 위로 날아오르고,
흰색 교복 위로 친구들의 낙서가 가득 채워지던 그 오후.
박영환은 조용히 교실 뒷문으로 들어와,
말없이 영란에게 한 장의 쪽지를 건넸다.
그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도 무표정했고, 눈빛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쪽지를 건네자마자,
뒷문을 열고 빠르게 교실을 떠났다.
그 쪽지엔 짧은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나는 너를 좋아했어.”
펜으로 눌러쓴 글씨.
서툴지만 정직하고,
마치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낸 듯한 문장이었다.
그 후,
그는 정말로 연락이 끊겼다.
고등학교도 달랐고,
연락처도 몰랐고,
집도 달랐고,
세상은 둘을 너무 빨리 떨어뜨려 놓았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그의 이름은 차츰 일기장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가끔 꿈에 나타날 때면,
그날 그 쪽지의 글씨체가
세상 어떤 책보다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마치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첫 페이지처럼,
그 기억은 그녀 마음 속에서
한 자락을 늘 조용히 차지하고 있었다.
현재 – 찾아가는 길
“인생이… 잘 안 됐어. 뭐, 다 그런 거지.”
영란이 혼잣말처럼 중얼이듯 내뱉자,
조용히 흐르던 차 안의 공기가 한순간 무거워졌다.
차창 밖으로는 서울 외곽의 낡은 풍경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마치 시간마저 그 동네에 발목을 잡힌 듯,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
“자, 여기… 맞아요?”
김대식이 핸들을 돌려 차를 한쪽 골목에 세웠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창밖으로는 벽돌이 군데군데
무너진 골목길과 오래된 슈퍼마켓,
페인트가 다 벗겨진 간판들,
그리고 그 안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묵은 일상이 느껴졌다.
마치 1980년대에서 뚝 떨어진 공간.
색이 바랜 포스터,
전봇대에 빼곡히 붙은 ‘월세 있습니다’ 전단지.
세탁소 앞에는 아직도 수동 다리미가 놓여 있었고,
골목 끝엔 주름진 얼굴의
노인이 비닐봉지를 들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영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디론가 빠져든 듯한 눈으로 공간을 응시하고 있었다.
“응… 여기 어디쯤일 거야.”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술집에서 일하면서 동네 심부름도 한다고 들었어.
담배 사러 가는 길에,
전봇대에 포스터 붙이기도 하고… 그런 일들.”
“그런 분이요… 지금은 좀 드문데요.”
김대식이 말을 고르며 조심스레 말했다.
마치 어떤 말이 상처가 되지 않을까, 매번 고민하는 사람처럼.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크게 말하지 않고, 크게 웃지도 않고,
늘 조심스럽지만 그 안에 깊은 배려를 품고 있는 남자.
영란은 그를 흘깃 보았다.
그리고 씩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나 기분 안 상했어.
내가 그런 말 듣고 삐질 나이도 아니고…
그냥… 봐야 해. 내 눈으로. 직접.”
김대식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해했다.
사람마다 놓지 못한 시간이 있다는 걸.
그 시간 안엔 잘못된 선택이든, 서툰 감정이든,
아무도 아닌 누군가가 되어버린 과거의 사람이든.
그걸 보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영란이 차문을 열고 내렸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 안에 땀이 맺힌 걸 느꼈다.
차가운 바람이 이마를 스치자,
땀이 식으며 짧은 전율이 지나갔다.
평생 강단 있고, 거침없고,
단 한 번도 누군가 앞에서 머뭇거려본 적 없는 여자가
지금은 낯선 골목 앞에서 주춤서고 있었다.
어깨에 힘을 빼려 했지만,
등줄기로 내려오는 긴장이 느껴졌다.
김대식은 그런 그녀의 등을 멀찍이서 바라보다,
조용히 옆에 섰다.
어떤 위로도 하지 않았고, 손도 내밀지 않았다.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쯤이면…”
영란은 중얼이며 한 발자국 골목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신발 밑창에서 ‘자박’ 소리가 나자,
마치 땅이 과거의 기억을 깨우듯 조금씩 울렁거렸다.
김대식은 몇 발자국 뒤에서 그녀를 따라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눈은 그 골목 구석구석을 스캔하고 있었다.
“저기 봐, 저 노란 간판.
저기… 옛날에는 다방이었다고 들었어.
지금은 호프집이래.
“혹시… 들어가서 박영환씨 아는지 물어 볼까요?”
김대식이 물었다.
영란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조금만 더 걷자.
그냥… 주변 공기부터 느껴야 할 것 같아.
내가 뭘 보러 왔는지도… 아직 잘 모르겠으니까.”
그녀는 골목 안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 발걸음엔 어떤 결심도, 어떤 용서도 아직 없었다.
그저 ‘과거’를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는
한 여자의 조용한 숨결만이,
거리에 흘러나고 있었다.
김대식은 그 뒤를 말없이 따랐다.
언젠가 그녀가 돌아봤을 때,
곁에 자신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불그스름하게 해가 지는 골목,
먼지 낀 간판들 사이로 여름의 끈적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는 먼저 슈퍼 앞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혹시, 박영환이라는 분 아세요?”
아주머니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박영환? 그 이름… 어디서 들어봤는데. 요즘은 안 보여요.
전에 저 다방 근처에서 본 적은 있어요.
거기서 뭐… 이런저런 일 한다던데.”
영란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뒤따라오던 대식도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두 사람은 다음으로 골목 안쪽
작은 세탁소 앞에 앉아 있는 허리 굽은 할아버지를 만났다.
빨래를 정리하던 손이 멈췄다.
“박영환이란 사람… 전에 이 근처 노숙도 하고,
술집 심부름도 했다던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근데 한동안 다방 뒤쪽 창고 같은 데서 지낸다고 들었어.
몸이 많이 안 좋다더구먼.”
“고맙습니다.”
영란은 진심으로 인사했다. 그 말에 담긴 뉘앙스가,
그냥 남 얘기 같지 않았다.
다음은 동네 공원.
거기엔
교복도 안 입은 중학생
남자아이 셋이 아이스크림을 빨며 앉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먼저 말했다.
“할머니, 뭐 찾으세요?”
“박영환이라는 사람 알아?”
"아니요 잘모르겠는데요"
그때 한아이가 끼어들며 이야기한다
“할아버지 중에 이상한 사람 있는데,
맨날 다방 옆에서 담배 피우고 있어요.
막 혼잣말도 하고…
근데 그 사람영환인지까 박영환인지까진 몰라요.”
“다방 옆?”
“네, 조그만 창고 같은 데요.”
영란은 고맙다며 웃었고,
대식은 아이들에게 조용히 음료수 하나씩 쥐여줬다.
조금 더 걸으니 중고가게 앞에서 라디오를
고치고 있던 중년 남자가 눈에 띄었다.
“박영환이요? 그 사람 여기저기 떠돌던데…
가끔 다방 쪽 창고에서 본 적 있어요.
그 앞에서 혼자 막걸리 마시기도 하고.”
“거기… 어떻게 가면 되죠?”
“이 골목 끝에서 왼쪽 꺾으면 조그만 포장마차 있고,
그 뒤편이에요.”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단서를 얻기 위해,
다방 근처 포장마차에 도착했다.
등판에 땀자국이 선명한 포장마차
주인은 생선구이를 뒤집으며 말했다.
“박영환? 아, 그 양반 아직 살아 있긴 하지.
낮엔 다방 심부름하고, 밤엔 저기 창고 앞에서 술 마셔.
파라솔 아래 깨진 의자에서 맨날 담배 피우고 앉아 있지.
말은 별로 안 해요. 그냥… 세상이랑 말 끊은 사람처럼 보여.”
영란은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김대식은 옆에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발끝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지나자,
빨래가 머리 위로 펄럭이고,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봉투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 길 끝에… 허름한 건물 앞 파라솔, 그리고 한 남자.
그 순간, 영란은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박영환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야기는 그제서야 시작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빨래가 머리 위로 펄럭이고,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봉투를 뒤적였다.
그리고, 그 길 끝.
낡은 파라솔 아래, 깨진 의자에 등을 기댄 남자가 있었다.
회색 런닝셔츠는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축 처진 어깨 위엔 무거운 시간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담배를 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영란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가 바로… 박영환이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그 이름은 입술 위에서 한참을 맴돌다, 마침내 흘러나왔다.
“영환아…”
그 순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게 충혈된 눈, 피곤에 절은 얼굴, 굳게 다문 입술.
한때 웃으면 보조개가 생기던 그 얼굴엔,
이제 세월의 주름과 술기운이 번져 있었다.
“…누구…?”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희미했다.
담배 연기 사이로 그가 천천히 눈을 좁히며,
그녀의 얼굴을 더듬었다.
“나야. 최영란.”
그는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피식 웃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그것은 반가움보다 체념에 가까웠다.
“…예쁘네. 지금도. 어릴 때처럼.”
“너… 왜 이렇게 됐어.”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듯, 목소리엔 떨림이 스며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맥주캔을 따며 대답했다.
“인생이… 잘 안 됐어. 뭐, 다 그런 거지.”
캔에서 흘러나온 맥주가
그의 손가락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일하다 다쳤어. 허리. 병원비가 없어서…
그다음부턴 그냥 사는 거지, 뭘 더 바래.
이젠 꿈도 없어. 그냥 이렇게 살다 가는 거야.”
“우리… 그때 참 좋았지?”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글쎄. 기억이 잘 안 나. 근데… 네 얼굴은 어릴 적 그대로네.
넌… 세월이 덜 밟고 갔나봐.”
그 말에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따뜻하기보단… 슬펐다.
“나, 너 좋아했어.”
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아. 그날…
졸업식 날 네가 내 책상에 쪽지 넣고 가는 거 봤거든.
그 쪽지… 아직도 기억나. ‘나는 너를 좋아했어.’
근데… 난 말 못했지. 무서웠거든.”
“뭐가 무서웠는데.”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다음이 뭔지를 몰랐어.
그냥 그 순간이 깨질까 봐,
그 말 한 마디에 우리가 멀어질까 봐.”
영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절 자신도 같았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넌… 잘 살았지?”
“아니. 세 번 이혼했어.”
“허허… 그래도 멋있게 늙었네. 나랑은 달라.”
그는 자기 다리를 툭툭 치며 웃었다.
다리에 박힌 상처 자국과 부어오른 발목이 눈에 들어왔다.
“갈게.”
그녀가 돌아서려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다시 걸음을 붙잡았다.
“영란아.”
“…응.”
“그때… 네 물병에, 난 진짜 목이 마른 게 아니었어.”
그녀는 멈춰 섰다.
“…알아. 나도 그날 일부러 물병 맨 앞에 꺼내놨었어.”
그 말에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입가에 작고,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잘가라. 멋있는 나도,
멋있는 모습으로 한 번쯤은 너를 만나고 싶었는데…
이런 꼬라지로 만나게 돼서 미안하다. 꼬맹아.”
“60먹고 들으니까 새롭네, 그 별명.”
그녀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야, 술 그만 먹고… 사람이 나 돼라.
그래도, 너니까… 내가 왔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마치 자기 자신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래… 영란이… 예뻤지.
그때가… 진짜 꿈 같았지.
그땐 내가 누굴 웃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 말은,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영란은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눈가로 떨어지는 눈물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별의 방식이었다.
[차로 가는길 ]
영란은 묘한 감정을 안고
김대식과 떨어져 차로 향하고있었다.
영란이 힘들어 보였던 김대식은 영란의 기분을 풀어주기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개그를 선보였다.
“영란씨 기분도 꿀꿀한데 제가
재미있는 퀴즈 내줄게요 맞춰 보세요 알았죠??”
영란은 말없이 걷고 있었지만
김대식은 흐르는 분위기를 느낄수 있었다.
“영란씨 그럼제가 문제를 말하면
맞추셔야 해요 시작합니다.!”
“모기가 주차한 곳은?”
영란은 표정없는 얼굴로 아무렇지않게 정답을 이야기했다
“모기장”
김대식은 당황스러워하며 다음 문제로 넘어간다
“뱀이 면허 따면?”
영란은 말없이 고민을 하고
김대식은 웃으면서 영란을 놀리기시작한다 그러자 영란은
무슨 그런 문제를 가지고 왔냐며 재미없다
그만하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김대식은 영란의 호통에도
웃음으로 넘어가는 사람이 였고
그 호통이 마음의 언어와는 다르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영란씨 답 궁금하시죠??”
“안궁금해 그만해 재미없으니까 얼른 차 시동이나걸어”
“궁금해하지 않아도 저기 하늘은 궁금해 할거에요”
“정답은 기어가!!”
정답을 이야기하는순간
영란은 김대식의 등짝을 치면서 바보짓좀 하지말라면서
묘한감정에서 빠져나온듯 차에 올라탔다.
[차 안 – 김대식과의 대화]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던중
김대식은 다시 한번 영란의
마음을 들어보고싶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후련하셨어요?”
대식이 물었다.
“아니. 마음이… 묘해.”
“그럼 왜 만나고 싶으셨어요?”
“그 시절의 나를… 한번 안아주고 싶었어.
그 애 말고. 그 애를 좋아하던, 그 바보 같은 나를.”
대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달리던 차 안에서 영란이 입을 열었다.
“대식씨.”
“네, 말씀하세요.”
“…미안한데, 내일 또 한 명 만나러 가야 돼요.”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기사님, 대기 중입니다.”
그녀도 피식 웃으며 창밖을 보았다.
창밖엔 지는 해가 있었고,
그녀의 첫사랑은
그 해에 묻혀,
다시 오지 않을
과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