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찾으러 같이 가줄래요?

by 아르칸테

김대식을 처음 봤을 때, 최영란은 큰 기대는 없었다.


"아, 또 누가 소개했구나.


나이 들수록 사람 보는 눈은 밝아지긴커녕,.


더 흐려지더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첫 마디에서


느껴지는 느릿한 말투와 눈가 주름 사이로 스


며든 웃음은, 그녀를 헷갈리게 했다.


그는 조용했고, 말이 빠르지 않았다.


성급하지 않았고, 웃음이많았다.


처음 본 날부터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았다.


“사장님은 왜 그렇게 혼자 잘 사세요?”


치킨을 트렁크 위에펼쳐놓고 종이컵에 맥주를 따르던 날,


김대식이 물었다.


“그게 궁금해서 저 만나주시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누가 옆에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은얼굴이라서요.”


“그럼 있던 사람들은 다 도망갔겠네요?”


“네. 제 카리스마, 제 판단력, 뭐 제가 가라고 안해도 본인들이


스스로들이다 떠났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그건 자조도 아니고 농담도아니었다.


그냥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


그런 솔직함에 김대식은 점점 더 끌렸다.


두 번째 데이트는 국수였다. 포장마차에서,


싸구려 가림막을사이에 두고 앉아


그들은 국수를 후루룩 먹었다.


김이 서린 플라스틱 그릇 사이로도 묘하게


따뜻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가 말했다.


“저는요, 그냥 사장님이 좋아요.”


“왜요?”


“그냥… 이유가 없어요. 그냥 좋아요.”


“제가 평생 친구 해드릴 테니까 겁내지마세요 ,,


결혼하자고 는 안할게요 하하하”


엉성하고 무모한 고백이었지만,


그 말은 묘하게 마음을 울렸다.


너무 정제되지 않아서, 오히려 진심이었다.


그날 밤, 영란은 거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술 한 모금 없이. 그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사랑… 그게 도대체 뭐였더라.”


그 순간, 오래된 여섯 개의 이름이 그녀의 마음을 건드렸다.


박영환. 김철진. 주병진. 서문진. 임정빈. 문주환.


“엄마, 무슨 생각해?”


옆방에서 책을 읽던 임초롱이 고개를 내밀었다.


딸이자 작가인 그녀는


요즘 들어 엄마의 말투와 표정을 더 자주


관찰하고 있었다.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서.”


“엄마는 사랑을 너무 의심해.”


“이년이 아니야 . 그냥… 잘 몰라서.


내가 했던 게 사랑이었는지,


누가 나를 사랑했던 건지도 헷갈려.”


“그럼 이제 배워볼 거야?”


“지랄 하네 “


하지만 그녀는 내심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중얼거린다.


“…. 나도 궁금해졌어. 내 감정이 진짜 사랑인지,


아니면 외로움이나 미련인지. 그걸 확인해보고 싶어.”


다음 날,


김대식이 도면을 들고 찾아왔다.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정직한 말투로 설계 변경


내용을 설명했다.


영란은 도면을 넘기다 말고,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대식 씨.”


“네.”


“내가 좀 이상한 얘기 하나 할 건데…”


“벌써부터 재밌어요.”


“…나, 사랑들 좀 찾아보려 해요.”


“…네?”


“여섯 명이에요. 내가 한때 정말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어요.”


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금세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저는 벨도 없나요?”


“또 그 말이야?”


“진심이에요. 계속 마음의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데,


문은 전부 옛사람들한테만 열리네요.”


“그게 아니에요. 그냥… 내가 지금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건 맞는데, 그게 사랑인지 모르겠어요.”


“…….”


“사랑이 뭔지도 모르겠고… 그걸 알고 싶어서요.


그래서… 옛사람들을 만나면 뭔가 보일까 싶어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너무 정직했기 때문에. 말장난이나 허세,


회피가 아니라 정말 진심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날 이후, 김대식은 한 달 동안 연락을 줄였다.


여전히 그녀가 부르면 오고, 할 일은 했지만,


예전만큼 눈을 오래 마주치거나 농담을 던지진 않았다.


임초롱은 그 변화를 가장 빨리 눈치챘다.


“엄마. 김대식 씨, 약간 멀어진 거 같지 않아?”


“응.”


“마음 접은 걸까?”


“아니. 기다리는 거 같아.”


“뭘?”


“내가 뭔가 다녀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초롱은 말했다. “엄마, 김대식 씨는 내가 봤을 때는요,


엄마보다 더 사랑을 아는 사람 같아.


그리고 그런 사람이 옆에 있는 건… 꽤 귀한 일이야.”



그리고 정확히 한 달 후.


영란이 설계 관련 현장 확인차 나갔을 때,


가을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김대식의 뒷모습이 보였다.


“비 맞고 뭐해요?”


그가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었다. 그런 눈빛은.


그리고 그가 말을했다.


“…최사장님.”


“왜요?”


“갑시다.”


“어디요?”


“그 사람들. 여섯 명. 찾아야죠.”


“진심이에요?”


“예. 처음엔 좀 서운했어요. 내가 이만큼 마음 열었는데,


또 옛날 사람들 생각하나 싶기도 했고…


근데 지금은 알아요. 사장님은 비교하러 가는 게 아니라,


확인하러 가는 거라는 걸.”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감정이 진짜인지 알고 싶고.


누군가와 평생 함께하려면, 이제는 확실히 알아야 하니까.”


“그럼, 같이 가요. 끝까지.”


“끝나고 나면…”


“그땐 저도 한 번… 초인종 눌러주세요.”


임초롱은 그 장면을 멀리서 보고 있었다.


조용히 핸드폰 메모장에 한 줄을 남겼다.


『사랑은, 누가 마음 문을 두드렸는지가 아니라…


그 문 앞에서 얼만큼 오래 서 있었는가로 결정된다.』


그녀는 엄마의 여정을 지켜보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