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데,그게 죄인가요?

by 아르칸테

“엄마, 당 떨어질 시간이에요.”

“너는 매번 사람 기분 떨어질 시간만 잘 알아봐.”


“말은 그렇게 해도 약 안 챙기면 제가 분노의 춤을 춥니다.”



최영란은 눈을 찡그리며 딸에게 약 봉투를 건네받는다.


당뇨약 한 알, 물 한 컵.


그녀의 4명의 자식들중 가장 유쾌하고 밝고


긍정적이며 재미있고 사람들과 말도 잘하고,


안해도되는


공감을 하는 딸이였다.


임초롱 , 28세. 작가.


머리는 늘 산발, 표정은 찰나마다 바뀌고,


감정이 얼굴에 안 올라온 날은 장례식장 갔다 온 날뿐이다.



“엄마, 오늘 그 시공사 사장님 온다 했지?”


“어. 김대식이라는 사람.”


“이름에서부터 약간 잘못된 연애의 향기가 나지 않아?”


“…그걸 이름으로 판단하니?”


“느낌이 와. 김! 대식! 이름이 좀 다정하잖아, 솔직히.”



최영란은 피식 웃어 넘겼다.


오늘은 신축 건물 외장 재견적 협의날.


그녀는 발주자이자 실소유주,


딸은 늘 옆에서 조력자이자 감정 리포터 역할을 자처한다.



정오 무렵,


작업복 차림의 한 남자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김대식입니다. 시공사 대표고요.


두 아들과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현장 마치고 바로 왔습니다.”



“두 아들?”


영란이 물었다.


“예. 큰아들 작은아들 둘 다 저랑 철근부터


시작해서 같이 배웠어요.


말 좀 안 듣는 편인데… 일은 잘합니다.”



“사람도 안 쓰고 집안 식구들만 쓰는 시공사는 처음이네.”


“하하, 가족만큼 믿을 사람이 없어서요.


물론 보고는 꼼꼼히 드릴 겁니다. 자, 이게 재견적서입니다.”



그의 손은 거칠고,


서류를 넘기는 손끝은 부드러웠다.


말은 무뚝뚝했지만,


그 안에 이상하게 따뜻한 공기가 돌았다.



그 순간,


딸 초롱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어머, 사장님 손 예쁘다.”


“…예?”


“막 벽돌도 들고 그러셨을 텐데, 손톱도 잘 깎으시고,


아 이건 섬세한 사람 손이에요.”



영란은 딸의 등짝을 가볍게 쳤다.


“야, 그런 거 왜 얘기해.”


“엄마는 맨날 손에 주름 많다고 그러잖아.


난 주름도 좋아. 손은 진심이 드러나는 부위야.”



김대식은 머쓱한 듯 웃었고,


최영란은 고개를 돌렸지만 그 미소를 못 본 건 아니었다.






며칠 뒤.



영란은 자재를 보러 간 김에,


창고 앞에 주차한 트럭 위에서 치킨 냄새를 맡는다.



“뭐야, 이건.”


“오늘은 현장 일 없이 따라온 김에 준비했어요.


차 위에서 치킨 한 조각 어때요?”



“지금 나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아뇨. 사장님은 일밖에 모르니까,


제가 먹을 핑계가 필요했죠.”


“그 말은 좀 맘에 드네.”



그녀는 트렁크에 앉아 다리를 꼬고, 닭다리를 하나 집었다.


곁에선 딸 초롱이가 사진을 찍는다.



“엄마, 지금 거의 잡지 화보야. 제목: 건물주와 트럭치킨.”


“제목이 뭐 그리 싼티나.”


“엄마 인생이니까~ 나는 편집해서 인스타에 올릴 거야.”



“그만 좀 굴러다녀.”


영란은 눈을 흘기며 웃었고,


대식은 조용히 치킨 한 조각을 영란 쪽으로 더 내밀었다.






며칠 후, 포장마차.



외장 타일 견적을 끝내고 근처 허름한 국수집에 들렀다.


대식은 무심한 듯, 김을 찢어 영란 쪽으로 밀어줬고


초롱이는 옆에서 계속 말을 이어간다.



“사장님, 결혼은 하셨어요?”


“예, 했었죠.”


“헉, 저희 엄마랑 커플이시네!”


“초롱아.”


“아니 뭐~ 엄마도 이혼 세 번 했잖아. 인생 한 판 더 해도 돼.”


“우리 딸은 입이 무기야.”


“저는 작가니까요. 언어로 먹고삽니다.


근데 엄마, 인정하긴 해야 돼.


사장님이랑 있으면 엄마 표정이 좀 부드러워져.”



영란은 아무 말 없이 국수를 휘저었다.


대식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기적처럼 따뜻한 공기가 있었다.


묻지도 않았고, 설명도 없었지만,


그 미소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냥… 좋아서요.”






그날 밤,



최영란은 혼자 거실에 앉아 생각했다.


딸은 방 안에서 글을 쓰고 있고,


TV는 켜져 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사랑… 그게 도대체 뭐였을까.”



그리고


기억이라는 이름의 문이 열렸다.



박영환.


김철진.


주병진.


서문진.


임정빈.


그리고 또하나..



그 이름들이


정확한 순서도 없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각기 다른 시간, 다른 계절,


다른 나이, 다른 눈빛.



심장이 뜨겁고,


손끝이 얼었던 그 시절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 이 감정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들을 한 번쯤은 다시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