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그날 밤, 서울 혜화동의 작은 술집.
영란은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야, 너 진짜 옷 일 미친 듯이 하더라.”
“어쩌겠냐. 안 하면, 나 같은 애는 잊혀.”
영란은 웃었지만, 눈가에는 피로가 서려 있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짙은 경상도 억양의 남자가 다가왔다.
“누나, 혹시 서울 사람입니까?”
영란이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뭐래, 너 몇 살이냐?”
“스물두 살입니다. 용인대 유도부.
근데... 누나는 진짜 멋있어요. 딱 내 스타일.”
친구들이 폭소했다.
영란은 피식 웃었지만,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상한 놈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였다.
그 남자, 김태식은 영란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직장 앞, 퇴근길 버스 정류장, 시장, 까지.
“누나.
내가 대학은 여기서 다니지만, 고향은 경상도다.
근데 누나 보면, 고향 생각이 하나도 안 나.
누나만 생각나.”
처음엔 두려웠고, 그다음엔 불쾌했지만,
그의 정성은 어딘가 외로웠던 영란의 마음을 조금씩 흔들었다.
사랑이라 믿었다.
그는 경기고 출신, 용인대 체육학과라는 배경을 가졌고,
영란에게 매일 도시락을 싸주고, 옷감 시장까지 데려다주며
진심을 표현했다.
“누나,
내가 누나 의상 잘하는 거 알아.
이렇게 이쁜 사람 처음 봤다.
나도, 누나가 하는 일 지켜보고 싶다.”
영란은 점점 마음을 열었다.
그날 이후, 김태식은 마치 영란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회식 자리였던 혜화동 호프집 앞,
혼자 야근하고 나오는 을지로 골목길,
심지어 영란이 단골로 다니는 동묘 옷감시장까지.
“누나, 마침 또 여기서 뵙네.”
“...또?”
“아, 아뇨. 저도 이 근처 볼일 있어서요. 우연이죠 뭐.”
매번 우연이라 말했지만, 그의 ‘우연’은 어김없이 그녀가 있는 곳에만 존재했다.
눈치를 챘을 땐 이미 늦었다.
그는 마치 누군가에게 하루 일정을 미리 받아 본 사람처럼,
늘 정확한 시간, 정확한 장소에 서 있었다.
어느 날은 옷감 짐을 옮기던 영란이 허리를 잡고 잠시 쉬고 있을 때,
태식이 다가와 허겁지겁 종이컵 커피를 건넸다.
“이거, 좀 식었는데… 그래도 허리 아플 땐 달달한 거 먹어야 된다고 해서.”
“야, 너… 이거 언제부터 기다렸냐?”
“별로 안 됐습니다. 저, 그냥… 혹시 도와드릴까 싶어서…”
영란은 입을 꾹 다물고 커피를 받았다.
따뜻하지 않은 커피였지만, 그 안엔 이상하리만치 묘한 정성이 스며 있었다.
그의 경상도 억양,
거칠지만 진심 같던 말투,
낯설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던 눈빛.
“싫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싫지는 않았다.”
그 시절 영란은 매일 야근과 과중한 주문 사이에서 지쳐 있었고,
고단한 하루 끝에 기다리는 말 한마디가,
“누나, 오늘도 예뻤어요.”
그 말 하나가, 이상하게 힘이 났다.
친구들은 농담처럼 말했다.
“야, 너 인기 짱이더라.
걔 또 왔더라? 지난번엔 네 회사 앞이더니, 이번엔 시장이래!”
“요즘 유행이래. 스토킹 로맨스.
처음엔 무섭고, 나중엔 감동이래~ 완전 ‘정우성 착각병’이야.”
영란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엔 어느샌가 익숙해져 버린 기묘한 안도감이 묻어 있었다.
“그래…
나도 이젠 혼자보단 낫다고 느낄 만큼…
지쳐 있었던 걸지도 몰라.”
그땐 몰랐다.
그 그림자가,
훗날 자신을 가장 어두운 골목으로 끌고 갈 줄은.
둘은 결혼을 약속도 없이 함께 살기 시작했다.
딸을 낳았다.
영란은 감각적이고 섬세한 손으로
작은 아기에게 손수 만든 내의를 입혔다.
“은영이… 우리 딸.
엄마가 널 꼭 지킬게.”
하지만 현실은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경제적 여건이 안 되고 남편은 아직 대학생에 군대도 다녀와야 하고
나중에 여건이 갖추어지면 딸과 같이 살 아야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시댁에 아이를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영란은 서울에 남아 의상일을 했다,
딸은 남편 쪽 가족이 돌봤다.
영란은 한 달에 한 번씩 기차를 타고,
잠깐의 품 안을 위해 집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없었다.
“은영이 어딨어요?”
시어머니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좋은 데로 갔다.”
“뭐라고요…?”
“입양됐다.
우리도 힘들다.
너는 맨날 밖에 나가고, 애는 어째 키우니.”
영란은 무너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 아이예요.
저는 허락한 적 없어요!”
“너 같은 게, 엄마는 무슨 엄마냐.”
그 한마디에
영란은 정신을 잃었다.
병원, 보건소, 입양센터를 뛰어다녔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벽 같은 말뿐이었다.
“아이는 이미 해외로 입양되었습니다,
생모와의 접촉은 금지됩니다.”
그리고 저희 쪽에서 이제 정보를 더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의 절반을 잃은 느낌과 동시에 쓰러졌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는 딸을 다시 찾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진짜 아이의 이름을,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세상에 자신밖에 없다는 현실이
너무나 서러웠다.
그날 밤,
태식은 술에 취해 돌아왔다.
“여보, 다 잘 되게 하려고 그런 기라.”
“... 뭐?”
“네가 밖에서 돈 벌잖아.
그래서 애한테도 좋은 삶을 줘야지 싶어서.”
영란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 딸을 나도모르게 팔아?
니 진짜 사람 새끼 맞냐?”
그는 소리쳤다.
“네가 엄마가 되긴 했나!
맨날 바쁘다, 늦는다.
애는 내가 다 봤다 아이가!”
그리고 손이 올라갔다.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깨진 컵 소리와 함께 영란의 눈빛도 깨졌다.
하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자기 자식을 위한 그 어머니의 단독적인 생각과 단독행동이었다.
그것에 대한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한 김태식.
김태식은 어머니가 하는 말이면 아무 말도 없이 따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항상 나를 무시했고 내가 태식이보다 10살 이상 차이 난다는 이유로 나를
너무나도 싫어했고, 그녀가 자기 아들을 꼬셔서
아들의 팔자를
송두리째 가져간 줄로 알고 있다.
그 후,
그는 울며 빌기도 했고,
다시 폭력으로 그녀를 억누르기도 했다.
그때마다 태식은 아이를 잃은 슬픔에 있기보다는 그녀가 떠나갈 거라는
불안함만을 담은 말만 나에게 반복할 뿐이었다.
“나 너 없으면 안 돼.
진짜야.
너만 있으면 돼.”
그 지독하고 끈질긴 집착은
사랑과 증오의 경계에서 나를 질식시켰다.
"우리가 너무 어려 어쩔 수 없었다 잖아
우리 엄마 좀 이해해 줘."
"머라고? 그래서
돈 주고 나도 모르게 은영이 팔았냐!!"
"너랑은 정말 엮이면 안 되겠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그렇게
그녀는 딸을 잃은 채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온 후로부터
그녀는 매일 꿈속에서 은영이를 보왔고,
눈을 뜨면 항상 눈물로 베개가 적서 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재봉틀 앞에 앉았다.
의상실의 조용한 새벽.
철컥, 철컥, 철컥——
기계는 리듬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손도, 마치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그날부터 영란은 자주 바늘에 손가락을 찔렸다.
“아이… 또…”
작은 핏방울이 하얀 면 위로 뚝, 떨어졌다.
그녀는 피를 훔치지도 않고 다시 바늘을 움직였다.
닦으면 더 번질 것 같았고,
그저 빨리 이 옷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끝나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만든 옷은 누구도 입지 않았다.
납품도, 주문도 없었다.
“지금 이 옷은 누구를 위해 짓는 걸까?”
문득 그렇게 생각하며,
바늘을 쥔 손이 멈췄다.
책상 구석엔 몇 년 전 샘플로 만든 아기 옷이 하나 있었다.
작디작은 레이스 달린 면 내의.
태어나던 날,
은영이에게 입혔던 그것과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그녀는 뚜벅뚜벅 걸어가 옷을 집어 들고는
가만히 품에 안았다.
“이건… 너 거였지?”
그녀는 상상했다.
내의를 입은 딸이 웃으며 뒤뚱뒤뚱 걸어오는 모습.
“엄마아—”
손을 뻗고, 입에 침이 가득 고인 채 뽀뽀를 하던 그 얼굴.
한 번도 안 늙은 그 모습 그대로,
은영이는 그녀의 기억 속에서만 자랐다.
현실의 시간은 흐르는데,
그 아이는 늘 세 살이었다.
밤이 깊었다.
재봉틀 앞에 앉은 그녀는,
이번엔 ‘엄마 옷’을 짓고 있었다.
주름이 잡힌 어깨,
검은색의 단정한 원피스.
누군가의 장례식에 어울릴 법한 디자인이었다.
“누가 입을까…”
그녀는 되물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아마… 나겠지.”
웃음도, 눈물도 없이
그저 입가만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
바늘 소리는 다시 돌아왔다.
철컥, 철컥.
세상에선 잠든 시간,
그녀만 깨어 있었다.
이 세상에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걸
그녀는 밤마다 떠올렸다.
그래서 오늘도,
그 이름 대신 바늘을 꿰었다.
이름을 꿰매듯,
기억을 꿰매듯,
부서진 심장을 꿰매듯.
매일 하루도 잊을 수 없이 힘든 날을 보낼 때,
동료 직장 친구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영란 씨, 무엇 때문에 힘든지 모르겠지만
힘들면 담배 피워봐 그나마 조금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나는 그렇게 까불고 놀 적에도 피지도 않던 담배를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의상실로 돌아와
바늘을 다시 잡으며
영란은 다짐했다.
“내가 만든 옷은
누군가의 생을 지키는 옷이 될 거야.”
그렇게 일부로 라도 억지로 라도
일을 더 열심히 해야만 했다
자꾸만 생각나는 나의 하나뿐인 딸,
삶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너무나도 평범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흘러가 지 않는 단 한 가지.
그녀 안에
결코 꿰매지지 않는 상처 하나가 남아 있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자신의 첫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