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던 어느 날,
서울에서 의상을 배우며 일하던 영란은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 한참 숨을 고르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나야."
그 목소리는 지독히도 익숙하고, 또 지독히도 지우고 싶은 음색이었다.
하지만 영란은 가만히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흐르는 그의
숨결이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품고 있었다.
"나 요즘… 너무 힘들어. 네 생각만 나.
네가 아니면 안 되겠어. 정말 잘할게. 이번엔 진짜야.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영란은 침묵했다. 이미 수없이 반복된 회유였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사람을 단호히 끊는 법을 배우지 못한 여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보고 싶었다.
그 아이, 첫 딸을. 시댁에서 몰래 입양 보낸,
그날 이후로 마음의 절반이 사라진 채로 살아왔다.
그 절반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아니 착각이 영란을 다시 걸음을 돌리게 했다.
그는 처음에는 정말 달라져 있었다.
집을 청소하고, 요리를 하고, 손 편지를 쓰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는지, 얼마나 미친 짓이었는지 이제 알겠어.
여보… 진짜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네가 없으면 나 정말 무너져."
그리고 영란은 그 말을 믿고, 다시 그 집에 들어섰다.
어느새 나는 둘째 아이를 안고, 어딘가에 첫째 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마음속에 품은 채로.
하지만 지옥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술을 마신 날이면, 그는 다른 인간이 되었다.
평소엔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던 손이, 술만 들어가면 벽을 치고, 식탁을 뒤엎고,
영란의 뺨을 때리는 손으로 바뀌었다.
"네가 내 인생 망쳤잖아. 내가, 나 명문고 나왔어!
내가 명문대에서 주목받던 애였다고! 근데 지금 이게 뭐야,
다 너 때문이잖아!"
"내가 현장에서 막일이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고!!
네가 다 책임져 너 때문이야."
그는 울면서도 분노했고, 분노하면서도 그녀를 탓했다.
감정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자였다.
낮에는 친구들 앞에서 애 아빠로,
듬직한 남편으로 행동했지만 술이 들어간
밤에는 지킬 앤 하이드처럼 변해갔다.
영란은 점점 피폐해졌다.
둘째 아이를 안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날이 왔다.
대학교 축제 날이었다. 그는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갔다가,
술을 마셨고… 아이를 잃어버렸다. 영란이 도착했을 땐 이미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고, 아이는 없었다.
"여보… 미안해. 잠깐 눈 돌린 사이에… 애가 없어졌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영란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땅이 꺼진 듯한 절망, 숨조차 쉬기 힘든 고통이었다.
영란은 다음 날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이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밥을 끊었고,잠을 끊었고.,웃음을 끊었다.
몸에서 가장 먼저 빠진 건 살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그녀는 아이의 사진을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서 있었다.
“혹시… 이 아이 보신 적 있으세요?”
하루에 수십 명에게 말을 걸었고, 다섯 명이 외면했고, 열 명이 지나쳤고,
한 노인이 그녀의 손에 사탕을 쥐어주며 말했다.
“아줌마도 엄마지? 찾을 거예요.”
그 한마디에 영란은 무릎이 꺾였다. 울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음 날부터는 서울을 벗어났다.
대전, 청주, 구미, 진주, 마산…
아이일지도 모르는 소문 하나에도 열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는 아이 옷을 입은 어린이만 보면 똑바로 앉을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비슷하면, 이름을 불러 보았다.
“태림아…”
대답은 없었지만, 어떤 아이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가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영란은 점점 망가졌다.
머리가 빠졌고, 손톱이 갈라졌고,
다리는 헌 운동화 안에서 피로 물들었다.
“괜찮아요?”
어떤 편의점 여직원이 컵라면을 건넸다.
“언니 눈빛이… 무서워요.”
그 말이 영란을 웃게 만들었다.
눈빛이 무섭다는 말에 웃다니.
그녀는 이제, 사람이 아니었다.
길 위에서 부유하는 유령 같았다.
아이를 찾는 여자의 형체만 남은 껍질.
그렇게 열 달.
영란은 서울부터 땅끝 마을까지 헤매며 사진을 들고뛰었다
매일 울었고, 매일 미쳤다. 지갑 속에는 항상 사탕과 돈이 들어 있었다.
혹시 길에서 비슷한 아이를 보면 건네주고 확인하려고. 아이가 엄마를 기억해 줄까,
혹시 목소리를 알아들을까. 그렇게 천일 동안 비와
눈을 맞으며 영란은 길 위에 살았다.
어느 날, 한 중학생 소녀가 영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홀트아동복지센터 같은 데도 찾아보셨어요? 저, 예전에 거기 있었어요."
"너무 어린아이들은 고아원에 먼저 가지 않아요
아주머니."
그 말 한마디에 영란은 다시 달렸다.
그 소녀가 알려준 홀트 아동복지회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얼굴이었다.
복지사는 영란을 보며 조심스럽게 사진을 한 장 내밀었다.
거기, 아이가 있었다. 낯익은 얼굴, 잃었던 절반.
내일이면 미국으로 입양 가기로 심사 가 끝나있는 상태였다.
하늘에게 너무 감사했고,
또 다른 인생을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영란은 울지도 못하고 숨도 쉬지 못한 채,
서류와 증거를 내밀었다. 자격을 증명했고, 혈액형, 출생 기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와의
눈빛이 서로를 확인시켜 주었다.
영란은 아이를 찾아냈다.
그 아이는 다 자라지 않았지만, 눈빛만큼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렇게 지옥의 끝에서, 영란은 스스로를 되찾았다.
다시 아이를 안고
돌아오는 그 길, 영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되뇌었다.
"다신 안 잃어버려. 다신, 누구도 내 곁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아."
그녀는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여자였다.
그러나 그 지옥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품은 그녀가 돌아온 집은 여전히 서늘했고,
공기 속에는 지난 시간의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가 다시 찾아왔다. 얼굴은 말라 있었고, 눈은 꺼져 있었지만 입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내가 미쳤었어.
너 없으면, 나 진짜 죽어.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무릎을 꿇었다.
영란은 문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봤다. 그 남자는 술에 절어 있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그렇게 그는 한 달을 넘게 용서를 해줄 때까지 밖에 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진심처럼 보였다 진실처럼 보였다...
창문 너머로 그는 작고 말라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작아진 건 그녀 안의 판단력이었다.
“저렇게까지 하는데…”
“나… 너무 악한 걸까?”
그녀는 혼잣말을 되뇌었다.
이 집 안에 있는 두 생명.
하나는 자신을 부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살렸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섰다.
입꼬리를 들어 올려 보았다.
“웃는 척은 잘 하는데…
왜 눈이 안 웃지.”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안에 오래 묻어 두었던 하나가 꿈틀거렸다.
바로 ‘의리’였다.
그녀는 자신을 망가뜨린 사람에게조차,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전제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를 용서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스스로를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다시 선택한 이 결정을, 두 번은 후회하지 않기를.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그녀는 오랜만에 웃는 척을 했다.
마치 다 괜찮을 것처럼.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그 안에서 또 하나의 생명이 태어났다.
그렇게 조용히 지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