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다신 아프지 않게 해 드릴게요. 정말이에요, 영란 씨.”
김성문은 그렇게 말하며 영란의 손을 꼭 잡았다. 울음을 꾹 삼키던 그녀의 눈가에,
처음으로 따뜻한 물결이 번졌다.
사랑이라는 말 대신,
‘책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남자.
그 남자는 가난하지만 성실했고, 무엇보다도 정을 갈구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매일 같이 와서 울며 애원했던 말,
“우리 엄마 산소에 같이 가달라”
는 부탁은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산소에 무릎을 꿇고 우는 김성문의 모습을 보며, 영란은 문득 생각했다. 이 사람은 정말 가족이 필요했구나.
그렇게 그들은 '함께 산다'는 걸 다시 시작했다.
김성문은 초반엔 정말 잘했다. 아이들 이름을 외우고, 반찬 투정을 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말한 규칙을 수첩에 적기까지 했다.
아이들도 그를 받아주었고, 집안엔 오랜만에 웃음이 피었다.
“엄마, 이 아저씨는 좀 귀엽다?”
“응, 이번엔… 괜찮을 것 같아.”
그 평화는 길어야 6개월이었다.
김성문은 어릴 때부터 자유롭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가족과의 룰 속에 살아본 적이 없었고.
아빠라는 이름의 무게를 짊어져본 적도 없었다.
반면 영란은 이미 수십 번의 인생 파도 속에서
‘안전’과 ‘질서’ 없이는 가정을 지킬 수 없다는 걸 몸으로 배운 사람이었다.
“여보, 집 들어오는 시간은 정하자. 아이들도 다 컸잖아.”
“아니 내가 애도 아니고, 뭐 시간마다 들어와야 돼?”
서서히 충돌이 시작됐다.
김성문은 일할 땐 성실하지만, 일이 없을 땐 한없이 느슨했다.
돈의 흐름에 대한 감각도 느렸다.
반면 그녀는 시간 단위로 매출과 비용을 계산하고,
어떤 가게가 3년 안에 망할지까지 눈치로 읽는 사람이었다.
“성문 씨, 수금은 언제 하는 거야. 또 밀리면 우리 엄청 힘들어져
내 돈으로 막는 것도 한계야 이제.”
“아이, 괜찮아~ 다음 달에 공사 있으니까.”
“나 못 믿어? 나만 믿어봐 내가 공사해서 돈 벌어줄게 지금은 공사할 시즌이 아니라 그런 거야
시즌이."
그 말은 정확히, 이진철이 초반에 했던 말과 똑같았다.
영란은 숨을 삼켰다.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똑같은 길로 가고 있는 건 아닐까?
김성문의 착함은 때로는 비겁함이었고,
그의 자유로움은 때로는 책임 회피였다.
게다가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현장일을 하면서 돈도 제대로 못 받아오는가 하면
친구들과 느와르 영화 찍기를 좋아하고
행동보다 항상 말이 앞서는 사람이었고,
단 한 번도 진지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때의 진심을 보왔기때문에
나는 그의 설득에 넘어갔다.
그녀는 그녀가 피같이 모은 돈으로 그의 착한 가면과 책임을 가장한 음성의 설득으로 인해,
공장도 차려주고 스카이고소작업차를 사주었다.
"아, 공장 차려주고 고소작업차 있으면 때 돈 벌고 내가 당신
호강시켜 줄 수 있어 더 이상 힘들게 나가서 돈 안 벌어도 돼 나만 믿어봐 내가 보여줄게."
"자식들도 다 성인이 되는데 돈이 많이 필요할 거야."
"하지만 그의 말은 허세에 불가했다. 자기 자신 스스로도 책임 못 지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의 가면에 그의 선한 음성에 나는 또 한 번 속았다. 아니 속아주었고
믿고 싶었다.
같이 돈도 잘 벌어보고 자리도 잡아서 안정되게 살고 그만 떠돌아 살고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보자고,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의 발목을 잡게 되고 빚이 늘어가는 열쇠가 되었다.
그의 안일한 생각과 미루는 스타일 뒷정리되지 않는 마인드,
책임지지 않는 자세, 뻔뻔한 말투.
그래도 그러는 와중에 영란을 잘 따르던 동생하나가 있었다.
왕혜옥. 영란보다 10살 이상 어렸지만 진심으로 그녀를 따랐다.
“언니… 나 언니처럼 되고 싶어요. 언니는 진짜 멋있어요.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와요?”
그 말에 그녀는 눈물 날 뻔했다. 세상에, 자신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혜옥은 항상 영란에게 먼저 연락하고, 조언을 구했고,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그녀를 따른다. 그녀는 영란이 지키고 싶은 몇 안 되는 ‘관계’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반대편엔, 점점 은근히 손 벌리는 남편 김성문이 있었다.
“여보, 이번 달 관리비가 좀 빠듯한데…”
“이번에 세금 나왔는데 좀 도와줘야 될 것 같아…”
"공사한 돈을 못 받아서 자제값을 못지불하 고있어.."
그녀는 감지하고 있었다. 다시 시작된 의존의 그림자.
그의 말에는 “내가 벌어서 줄게”가 아니라 “당신이 좀 더 벌면 되잖아”라는 뉘앙스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였다.
“이번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야.”
그렇게 그래도 이 사람이 마지막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마음을 여유롭게 갖고
그 사람을 이해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내가 마음으로 불쌍하게 여기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짓말은 시간이 갈수록 대담해지고,
술병은 매일 한 몸과 같이 붙어있었다.
그때마다 혜옥은 내 옆에서 든든한 마음의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언니, 힘들면 나 불러 내가 도와줄게 돈은 없고
언니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내가 데려가주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사줄게."
참 그 말이 순수한 그 말이 너무나도 고마웠고,
그녀는 그런 혜옥이를 꼭 성공시켜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