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그날, 바람은 유난히 매서웠다.
하늘은 얼어붙은 듯 회색이었고,
발끝에서부터 살을 파고드는 한기가 번졌다.
겨울이었다.
영란은 시장을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자식들은 제각기 일터와 학원, 집안 일로 따로 움직이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먼저 도착한 것은 넷째 딸과 영란이었다.
차를 세운 순간,
“엄마! 집이…”
그녀의 비명이 공중을 찢었다.
영란이 도착했을 땐,
이미 마을 앞이 소란스러웠고,
검은 연기와 주황 불빛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였다.
119차, 소방차, 경찰차, 구급차.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오직,
그 타오르는 집 하나에만 꽂혀 있었다.
“사람 있어요! 욕실 안에 사람 있다고요!!”
구급대원중 한 사람이 외쳤다.
술에 취해 잠들었던 김성문은
집 안의 욕실에 갇혀 있었다.
“창문 열려 있어요! 빨리요!”
소방대원이 물을 뿌리며
불길을 뚫고 들어갔고,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휴 저 집 망했어 망했어"
"큰일 났네 저게 어쩌다 타버린 거야."
그리고 그 주변에는 항상 그녀를 질투하던 동네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걱정이 담긴 환호 속에서
몇 분 후—구조요원들이
그를 질질 끌고 나오듯이 구조해 냈다.
그는 반쯤 의식을 잃은 채,
검게 그을린 얼굴로 들것 위에 누웠다.
코와 입에서 거칠게 연기를 토했다.
불이 난 원인을 조사해 보니, 김성문이 집에 와서 화목난로의 재를 치우겠다며
뚜껑을 열어둔 채 씻으러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술기운에 난로 상태를 잊어버린 사이,
불길은 통 안에서 점점 치솟아 올랐고, 마침내 집 안으로 번져 화재로 이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김성문의 모습을 영란은 쳐다보며 말했다.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술 먹었지…
그래, 또…
그렇게 끝내려고 했던 거니?”
그러나 눈물은 없었다.
분노도 없었다.
오히려 그 모든 장면을
하나의 지나가는 장면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또 저 집이야…”
"저 집은 조용할 날이 없어."
“이제 저 남자는 정말 끝일 거다.”
“근데 대단하긴 해… 저 여자는…”
“불이 났는데 울지도 않아.”
"남편이 죽었으면 하는 거 아니야?"
아이들도 하나씩 도착했다.
각자 다른 곳에서,
차에서 내려 불길을 바라보았다.
넷째는 입을 틀어막았고,
막내는 엄마 손을 꽉 붙잡았다.
아들들은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란은 그들을 모아 안았다.
“괜찮아.
사람 안 죽었어.
다시 지으면 돼.”
그 말 한마디에
아이들의 어깨에서 긴장이 풀렸다.
엄마가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엄마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김성문은 병원으로 실려 갔다.
연기 흡입, 그래도 다행인 건 욕실에 있어서 다친 곳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지 않은 것 또한 기적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집안에서 타지 않고 남은 물건이 있을까 해서
영란과 가족들이 한 곳에 모였다.
그 자리에 는 김성문도 있었다.
김성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미안해… 미안해…”
그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영란은 앉아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그리고 말없이 한숨을 내쉬더니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살았으니 된 거야.
다시 시작해.
이번엔 제대로 해.”
“진짜 정신 못 차리고 또 술 먹고 그러면 죽는다.”
그 순간, 불이 난 그 현장은 조용했다.
김성문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란은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이 불길이 내 인생의 끝이 아니라
또 한 번의 시작이 될 수 있길.”
몇 주 뒤,
영란은 다시 땅을 팠다.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
또 한 번의 집을 지었다.
철근, 시멘트, 벽돌, 그리고 사람의 믿음.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해졌고,
아이들 역시 그녀를 중심으로 뭉쳤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인생은 잘 살았는지 주변의 지인들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놈의 남편들만 문제였다.
김성문도 묵묵히 집을 짓는 일에 힘을 보탰다.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나무를 나르고, 못을 박으며,
흙먼지 속에서도 한마디 불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늘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자신의 내 실수, 화목난로에서 비롯된 불길이 집을 집어삼킨 그 사건이 아직도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책감에 그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고, 사람들의 시선 앞에 서는 일도 꺼려했다.
영란은 그런 그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굳은살 박힌 손으로 묵묵히 일을 이어가면서도, 미안함에 눈길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그 사내. 그 안쓰럽고도 진지한 모습 속에서 영란은 알 수 없는 확신을 느꼈다.
그래, 이제 이 사람도 달라질 거야. 진정으로 사람이 될 거야.
그 다짐은 마치 작은 불씨처럼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5개월 후.
새로 지은 집으로 가족 모두가 들어섰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 집 안에는 작은 따뜻함이 살아 있었다.
영란은 창문을 열었다.
밖으로 진눈깨비가 날렸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이제,
두려움보다 생존을 더 잘 아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