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그렇게 불길이 지나가고 7개월이 흘렀다.
그리고
문제는 그 뒤부터였다.
김성문
겉으론 철저하게 ‘착한 가장’이었다.
장날이면 시장 어귀에서
어르신들의 짐을 번쩍 들어주며 웃었고,
마을 회관 앞마당 잔치에는 늘 먼저 도착해
김칫국에 수저를 놓고 앉아 있었다.
동네 어르신들은 그를 두고 말했다.
> “아이고, 저런 남편 얻은 건 천운이지.”
“허허, 성문이 그 양반은 말은 없어도 정이 있지.”
“영란은 여장부고, 성문이는 뭐랄까… 참 복 많은 남자지.”
하지만 정작 그 ‘복 많은 남자’는,
그 말들을 능청스럽게 소비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마을에서
‘불쌍한 남편, 고생 많은 남자’라는
가면을 완벽히 쓰고 있었다.
그녀는 성실하고 단단하고 고집불통인 ‘여장군’이었고,
김성문은 그 옆에서 허둥거리며 따라가는
‘소심하고 조용한 남편’이었다.
"돼지, 그거 저기다 설치하라니까!"
"아- 알았어 여보"
"이렇게 맞지?"
"아니 그게 아니잖아 다시 해 다시!"
자식들이 보기엔,
그저 말이 많고 장난기가 심한 사람일 뿐이었다.
가끔 일을 망치기도 했지만,
‘마음만은 착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연기’였다.
그는 스스로 말했다.
“나는 이 집엔 못 들어가. 애들 떠드는 거 힘들어.”
“원룸에서 출퇴근하고 자기가 부르면 일하러 오고 조용히 살게.
뭐, 나도 이제 나이 들었잖아.”
"사고 칠 나이도 지났고 당신한테 잘못한 것도 많고"
그녀는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배려심 있는 남편이라 믿었고,
그 역시 이제 철들었다고 생각했다.
본인도 가족은 좋지만 혼자 살던 시간이 길었기에
자유가 필요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철저한 계산이었다.
그는 방탕하게 놀기 위해 원룸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새벽마다 나가 술자리를 벌였고
마사지를 받으러 다녔으며
전 와이프와도 연락을 이어가며
“이제 그 여자랑 끝났어, 나 자유야”라며
숨겨진 계좌에서 돈을 송금해주고 있었다.
통장도 새로 만들었다.
공사 현장 수금은 그 통장으로 받고,
가족에게는 "수금이 안 돼"라며 거짓말을 했다.
그는 천재적인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나는 원래 일이 안 풀려.”
“당신이 강해서 내가 항상 기죽어.”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잠도 못 자.”
“예전에는 내가 진짜 잘 나갔는데 말이야…”
"요즘에 현장에 일이 없어 나라가 힘들어서 그런가 봐"
그 말들은,
영란의 지인들에게도 퍼져 있었다.
그녀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에도,
돈 한 푼 도와주지 않고 자신의 재미를 위해 그녀를 이용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속에
김성문은 항상 어딘가 “착한데 불쌍한 남자”로 남았다.
그녀의 자식들도 그걸 몰랐다.
그가 그렇게 배후에서 돈을 빼돌리고,
그렇게 조용히 우리 가족을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
영란은 믿었고,
자식들은 속았다.
그리고 그렇게 3년이 흘렀다.
김성문은 나날이
술에 더 취했고
거짓말에 더 능해졌으며
우리의 의심을 더 능청스럽게 무마했다.
그 와중에도
영란은 새로운 집을 설계하고 있었다.
이 삶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그는 말했다.
> “나는 원룸 살면 돼.
손녀도 시끄럽게 놀고 뛰어다녀야 하는데, 나는 일찍 일도 나가야 하고
나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
“네가 좋은 집 지으면, 난 거기 말고 원룸에 있을게.
괜히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김성문의 계획대로 별거를 하게 됐고
그의 가면은 점점 더 두껍게 덧칠해 갔다.
그렇게 그녀를 속여가며 방탄한 삶을 살고
가족들 앞에서는 한없이 착한 사람
그녀의 앞에서만큼은 풀 죽은 강아지처럼
연기를 하며, 그녀가 시키는 일은 열심히 하는 척
그렇게 뒤에서 몰래 김성문은 친자식과 함께 그녀를 속이며 공사를 하고 돈을 벌고
방탄의 연속과 거짓말 이중성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결국, 거짓된 삶에 그가 자신의 방탄을 위한 노력의 결과로
스스로 쓰러졌다.
119가 왔고,
그는 뇌경색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말했다.
> “생존 확률 1%입니다.
수술은 하실 건가요?”
그 순간,
그녀는 그가 쓰러진 이유가 그의 욕망 때문이라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말했다.
> “하세요. 살려주세요.
어쨌든… 우리 가족이에요.”
그렇게 아무도 시도하려 하지 않던 수술, 의사조차도 거부하던 그 수술을
엄마의 단호한 결정으로 기적처럼
다시 그를 살려 낸 것이다.
의사들은 말했다.
> “우와 정말 다행입니다.”
사실 병원에 실려오실 때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거든요."
정말 의사의 말대로 수술은 극적으로 성공했다.
그는 간신히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살아났네.
"병원 가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뭐 자기가 이 집에서
제일 건강하다고?"
그렇게 말 안 듣더니, 술 먹지 말라니까 자꾸 먹고.
저렇게 될 줄 몰랐겠어?”
그리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는... 철 좀 들었겠지.
생명의 은인을 보고도 정신 못 차리면
그건 사람이 아니지.”
그녀는 믿었다.
이번만큼은,
정말 이번만큼은
그도 깨달았으리라 생각했다.
사람이 이 정도까지 가고 나면, 바뀌는 거라고.
하지만—
그 믿음은 곧 다시 무너졌다.
그리고 이번엔,
상상조차 못 한 방식으로.
김성문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였는지 알려주는 사건이 생겼다.
김성문의 휴대폰으로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왔다.
“빚 갚으세요.”
“언제까지 미루실 겁니까?”
“받을 때까지 계속 전화합니다.”
처음엔
영란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그 빚이 남아 있었구나...’
이미 몇 번을 감당해 온 일이었다.
처음도 아니었고,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참았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전화를 받은 횟수가 스무 통을 넘어가고,
하루에만 다섯 명이 다급하게 걸려오자,
엄마는 그의 병실로 찾아갔다.
“돼지, 나 이제 다 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지금 말하면,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내가 용서해 줄게.."
"그냥 말해. 솔직하게.”
그는 그 특유의
능청스럽고 느릿한 말투가 담긴 얼굴로
글을 적었다.
“에이, 무슨 그런 거까지...
나 그런 거 없어.
걱정하지 마, 진짜.”
반신마비가 온몸,
의미 없는 웃음.
그리고 장난처럼 내뱉은 한마디.
>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래.
그냥 애들이 좀 떠들어 댄 거겠지~”
엄마는 말없이 돌아섰다.
"살려놨더니, 또 장난을 쳐, 또 거짓말을 해?
이게 사람이야?"
며칠 뒤,
엄마는 셋째가 차 사고 수리건으로
예전에 김성문이 찍어둔 사진을 찾기 위해
김성문의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음성 녹음’ 폴더를 발견했다.
파일은
5년 전부터 저장되어 있었다.
순간,
왠지 모를 불길함이
등골을 따라 내려왔다.
그리고
첫 번째 녹음을 눌렀을 때,
그 안에는 ‘지옥’이 있었다.
술집 여자와의 저속한 대화.
“집 사람은 답답해 죽겠어. 넌 정말 내 스타일이야.”
전 와이프에게 “이제 나 집 나왔어. 매일 연락하자.”
“영란언니? 그 여자 돈 많잖아. 그 여자한테 2천만 원 얘기 좀 해봐.”
“공사 수금? 거짓말이지. 다 따로 통장 만들었어.”
그렇게
음성 하나하나가
영란의 시간, 믿음, 삶을 부숴나갔다.
수술은 보이는 사람을 살려냈지만,
진짜 괴물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교활해졌고,
더 능숙해졌으며,
이제는 병석에서도
“장난처럼 사람을 속이고 있었다.”
그는 우리와 인연을 맺은 지 이제 10년이 다 돼가는 중이었고
불나고 잠잠해진 지 이제 2년 다 돼가고 있었다.
영란은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김성문의 목소리를
다른 사람으로 의심하고 싶었다.
그의 휴대폰 속 5년의 기록
아니 더 이전부터 그랬을 거란 생각까지
들게 하는 그의 편안한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