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김성문의 폰 속에서 흘러나온 음성들.
그건 단순한 ‘과거의 실수’가 아니었다.
계속된 계획, 계속된 조롱, 계속된 배신.
그 파일 속 김성문은,
해석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휴~ 집사람? 그 여자는 자식 밖에 모르고 그리고
원래 착해서 속이기 쉬워.”
“내가 이 집에만 얌전히 있는 줄 알아? 미쳤냐?”
“이번엔 쟤 통장에 들어오는 거 내가 먼저 챙겼지 ”
“나 불쌍한 척만 하면 걔는 다 넘어가. 그게 좋더라~”
“그리고 마음 약해서 용서도 잘해주고”
그녀는 8시간에 걸쳐 화장실에 앉아
그의 음성녹음 파일을 다 듣고 난 후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는
그 어떤 음악보다도 크게 들렸다.
방 안은 조용했고,
아침이 되었고
겨울 햇살이 조용히 들어왔다.
그 따뜻함조차도
거짓처럼 느껴지는 순간.
그녀는 방 안 침대에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떨군 채,
처음으로 김성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속삭였다.
“이제, 됐어. 여기까지야.”
그동안 몇 번이고
배신을 참아왔고,
그 어떤 욕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목숨까지 구해줬던 남자.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를 버리기로 했다.
이것은 분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는 선언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는 모두 모른 채 앉아 있었고,
그녀는 아주 평범하게,
마치 된장찌개 레시피를 읊듯 조용히 말했다.
“이제는, 아빠 안 데리고 살 거야.”
“다 끝났어.
난 다 알아.
그 사람한테, 더는 기회를 줄 필요 없어.”
우리는 놀라움과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안도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 말을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다음 날,
그녀는 병원으로 갔다.
김성문은 아직 반신불수였지만
여전히 입꼬리는 느슨하게 올라가 있었다.
“여보, 나 오늘 기분이 좀 괜찮아.
"나 요즘 우울증 올 거 같아 더 자주 찾아와."
"집엔 언제쯤 갈 수 있으려나~?
아, 나 돌아가면 장사할 거야”
“회도 먹고 싶어.”
그녀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김태식, 이진철, 그리고 김성문,
당신은 나를 평생 속였어.
나도 몰랐고, 애들도 몰랐고…
근데 이제는,
나 스스로한테 거짓말 못 하겠어.”
김성문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금세 농담처럼 글을 젂었다.
“뭘 또 그렇게 진지하게 그래~
나 다리만 낫고 나면 다 잘할게~”
“당신이 최고야.”
그러나 그 사람의 입에서는 잘못했다
이때까지 속여서 미안하다 그런 말이 사람이라면 해야 하고 해야만 하는
사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 소리만 했더라도 진심과 단 한 번의 진지함을 보여준 사과의 말을 했더라면,
봐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선택을 했다.
영란은,
이번엔 웃지 않았다.
손에 쥔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요양시설 입소 동의서.
“여긴 앞으로 당신 갈 곳이야.
난 거기까지는 도와줄게.
그 이상은, 나도 이제 내 인생 살아야 해.”
김성문은 처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평생 사람을 조롱하던 그 입으로
이번엔 자기 자신이 조롱당하는 시간.
그러나 그가 뱉은 마지막말은
잘못했어 한번만 용서해 줘.. 잘할게...
그녀는 병원을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겨울 하늘은 높았고,
바람은 찼지만
어딘가 맑았다.
그 바람 속에서
그녀는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이제 진짜, 나를 살려야 해.”
이 한 문장은
그녀의 복수도 아니고,
누구를 벌주는 것도 아니고,
살아남은 사람으로서의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진짜 그녀의 자유가
시작되었다.
그의 짐 정리를 끝낸 오후,
원룸엔 더 이상 김성문의 흔적이 없었다.
영란은 창문을 활짝 열고
묵은 냄새와 지난 시간들을 날려 보냈다.
그때 울린 전화.
‘김주원’
영란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엄마 아빠 트럭 어디 있어요
급히 사용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갔다.
"아빠 거 없다.
아 그리고 "
> “그런데 한 가지 묻자.
너희 둘이서 밥 먹고,
놀러 다니고,
공사도 몰래 하고,
돈도 벌고…
그동안 왜 엄마한테 한 마디도 안 했냐?”
주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 가족인데… 그거 하면 안 돼요?”
그 말에,
영란의 입꼬리가 짧게 올라갔다.
조용한 분노,
그리고 단호함.
> “그래. 말 잘했다.”
> “가족이니까, 이제 네 아빠는 네가 챙겨라.”
그 한 마디로
모든 관계가 끝났다.
영란은 말을 더 하지 않았다.
주원의 입에서 나올 어떤 말도
이제는 의미 없었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섰다.
손에 잡히는 따뜻한 빛이
조금은 무거운 마음을 눌러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주원이에게서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엄마,
아까는 제가 생각이 너무 짧았어요.
전화 끊고 나서 생각 많이 했습니다.
진짜 가족도 아니면서
너무 쉽게 엄마란 말 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잘 몰랐어요.
아빠가 엄마한테 얼마나 상처 줬는지,
엄마가 그동안 뭘 감당해 왔는지.
같이 밥 먹고 웃고,
그게 그냥 좋은 줄만 알았는데
그게 누군가한테는 배신일 수도 있었단 걸
이제야 알았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이해합니다.
몸 잘 챙기시고,
이제는 엄마도 엄마 인생 사세요.
아빠랑 살아주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