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1
도시는 오늘도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자동차의 브레이크, 길거리에서 튕겨 나가는 캔 소리, 신호등이 바뀔 때의 짧은 알림음.
그러나 이 도시에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아주 작은 이상 현상이 퍼지고 있었다.
낡은 전단지 한 장이 도시 바람을 타고 골목 어귀로 흩날렸다.
낡은 벽에 부딪히다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식당 앞을 청소하던 한 남자가 무심히 집어 들었다.
“당신의 삶을 바꾸고 싶다면, 여기에 전화하시오.”
그는 허리를 펴며 고개를 갸웃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고, 손가락은 어느새 전단지 속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삐——’라는 발신음.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통화를 눌렀다.
다른 쪽 어딘가, 불 꺼진 방에서 청년은 침대에 누운 채 핸드폰을 스크롤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피곤하고, 숨결은 무기력했다.
그러다 우연히 광고 하나가 화면을 채웠다.
“당신의 감정, 윤리는 어디까지입니까?”
무심코 터치한 손끝.
화면은 잠시 깜빡이더니 문구 하나를 띄웠다.
“합격되었습니다.”
순간, 화면 아래 위치 정보가 자동으로 연동되고, 이어지는 문장.
“최대 상금 30억 원.”
청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어디선가 피어오르는 흥미, 혹은 파멸의 씨앗이었다.
출근길 지하철 역사.
정장을 입은 남성이 역 벽면의 광고판을 바라보다 멈췄다.
“무작위 생존 심리 실험 – 참여자 모집 중”
한 남성이 다가와 포스터를 조용히 떼어갔다.
그의 뒷모습만 보일 뿐, 얼굴은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백색 벽면이 둘러싼 인터뷰룸.
각기 다른 참가자들이 카메라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다르게 생겼지만, 표정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포기와 기대, 자조와 결심 사이.
“돈 때문이죠. 빚이 많거든요.”
“진짜 게임처럼 해보래서요. 심심해서요.”
“사람이 거짓말할 때 어떻게 말하는지 궁금했어요.”
“그냥… 사라지고 싶었어요.”
카메라는 얼굴을 오래 비췄다.
그 표정 속, 그 어떤 말보다 더 많은 말이 숨어 있었다.
새벽 안개가 내려앉은 버스 대합소.
검은 정장을 입은 관리인이 명단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앞에, 백여 명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누군가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고,
누군가는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카메라는 그들의 눈동자를 훑었다.
기대, 공허, 무표정, 두려움.
사람마다 다르지만, 무언가 같은 공기를 들이쉬고 있었다.
버스가 도착하고, 그들은 조용히, 한 명씩 버스에 올랐다.
그 순간.
멀리 건물 옥상에서, 누군가가 카메라 렌즈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회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존재.
모든 것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게임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게 진짜일 거라곤 믿지 않았다.”
초봄의 안개는 마치 이 세상이 아닌 것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버스 한 대가 골목을 돌아 조용한 마을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참가자들이 차례로 내렸다.
그리고 모두들 휴대폰과 소지품을 데스크에 맡기고있었다.
신발 소리. 숨소리. 시선.
그 작은 소리들만이 존재했다.
이곳은 현실처럼 보였지만, 현실과는 어딘가 다른 공간이었다.
간판은 있었으나 불은 꺼져 있었고,
경찰도, CCTV도, 전파도 없었다.
누군가가 이 마을을, 하나의 무대처럼 세팅해 놓은 듯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관리인이 번호표를 나눠주었다.
“이 마을은 외부와 단절되어 있습니다.
밤에는 각자 숙소에 머물고, 낮에는 자유롭게 생활하시면 됩니다.
단, 규칙은 하나.
‘당신의 감정은 당신의 책임입니다.’”
말의 끝에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참가자들의 눈빛이 이어받았다.
류태림, 서른하나.
그는 말없이 주변을 스캔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동자, 걸음걸이, 무거운 가방의 끌림까지—
그 어떤 단어도 없이, 그는 감정을 읽고 있었다.
차민재, 서른하나.
반듯한 얼굴, 하지만 웃음의 온도는 묘하게 낮았다.
“안녕하세요. 여기 혹시 예능 아니죠?
하하, 분위기가 너무 조용해서…”
그는 말을 건넸지만, 마음은 닫혀 있었다.
주머니 속 작은 녹음기가 반짝였다.
김하림, 스물둘.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건 꿈이에요… 내가 전에 본… 그 장면 맞아… 아니야…”
그녀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누구도 그 시선을 오래 마주보지 못했다.
박태우, 마흔.
근육질의 남자. 그의 눈빛엔 말보다 앞서는 의심이 있었다.
“앞 좀 보고 다니시지?”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힌 그는 무심히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위험을 예감하고 있었다.
정동진, 서른.
혼잣말을 멈추지 않았다.
“난 사실 여기 설계자 중 한 명이야. 농담 아니고… 뭐? 왜 웃어?”
현실감이 흐릿한 그의 말은 농담 같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박병철, 마흔넷.
운동복 차림에, 목엔 땀이 맺혀 있었다.
“지금도 하고 있죠. 당신은 싸움 못하죠?”
그의 말은 웃음 속에 경고를 담고 있었다.
머리에는 이긴다 가 적혀져있는 머리띠를 착용했다.
참가자들이 모두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발걸음 위, 하늘 어딘가에서 카메라가 또렷이 그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총 111명 –
시민 100, 범죄자 10,
그리고 그 누구도 모르는 단 한 명의 설계자.”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오전 10시, 마을 중심에 있는 낡은 운동장 같은 광장.
군데군데 벤치가 동그랗게 배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벤치에 흩어져 앉아, 말없이 서로를 관찰하고 있었다.
어딘가 숨을 죽인 분위기.
말 한 마디 없이도 기침 소리 하나에 고개가 돌아가는 예민함.
그때, 마을 전역에 울려 퍼지는 기계음.
突–
찌그러진 듯 왜곡된, 남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퍼졌다.
“당신들은 지금부터 인간의 본성을 실험하는
역사상 유일한 게임에 참여하게 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게임은 ‘마피아’의 규칙에 기반합니다.
밤에는 살인이 벌어지고, 낮에는 공개 투표로 처형이 이뤄집니다.”
“뭐야, 이거 예능 아니었어요?”
한 참가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람이 죽는다고? 진짜로?”
그러나 스피커 속 목소리는 감정을 담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이건 예능이 아닙니다.
단 하나의 규칙, ‘감정은 당신의 무기이자 단서’가 될 것입니다.”
류태림은 아무 말 없이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 대신, 표정의 일그러짐, 시선의 방향,
숨소리의 높낮이를 읽고 있었다.
박태우가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엔 분노와 혼란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런 건 신고부터 해야지. 진짜 사람 죽는다고?!”
주성철 방송안내를 들으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현실파악을 못하고있다.
"와 이거 실감나게 만들어놨네"
"딱 내가 원하는 스타일인데?"
“이 마을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전화, 인터넷, 전파… 어떤 통신도 불가합니다.
단지 감정과 선택만이 이 세계의 언어입니다.”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눈에 불을 붙였고,
누군가에겐 기절 직전의 공포를 안겼다.
누군가는 토했고, 누군가는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민재는 웃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의 눈동자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광장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가 주머니 속에서 손을 꺼냈을 때, 작은 녹음기의 빨간 불빛이 켜졌다.
반면 김하림은 광장 구석에 주저앉아 귀를 막고 있었다.
눈은 미쳐버릴 듯 휘둥그레 떴고, 입술은 멈추지 않고 떨렸다.
“아니야… 그 목소리… 전에 꿈에서 들었어… 왜 또 시작됐지…”
스피커는 마지막 공지를 남기고 끊겼다.
“오늘 밤,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위험은 ‘당신 곁에 있는 자’입니다.”
突–
방송이 끊기고, 광장은 침묵에 잠겼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시선에는 어떤 말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눈빛만이, 질문을 주고받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날 오후 2시.
스피커가 다시 한 번 울렸다.
“모든 참가자는 자신의 번호를 받고, 그 번호가 새겨진 집으로 이동하십시오.
방 안에는 각자의 역할이 적힌 종이가 있습니다.
역할 공개는 추후에 이루어집니다.
그때까지 절대 신분을 누설하지 마십시오.”
밤 11시 30분.
마을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가로등은 깜빡이며, 바람이 전선을 스치듯 불었다.
각자의 숙소, 각자의 고독.
그 안에서 벌어진 ‘첫 번째 밤’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조용히 펜을 굴리며 메모하고 있었다.
“거짓말을 숨기는 건 말이 아니라 감정이다.
말은 통제할 수 있어도, 눈은 항상 늦는다.”
적힌 단어들
어깨 떨림 – 민재
현실감 부족 – 정동진
입꼬리 위쪽 떨림 – 백하윤
그는 고개를 들어 책상 옆에 놓인 봉투를 들여다봤다.
그 안엔 ‘시민’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그는 짧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생존과 진실 사이, 시민이라는 이름은 가장 취약한 위치일지 모른다.
“언론인.”
그는 종이를 읽고 중얼거렸다.
“내 체질은 아니지만 해봐야지.”
책상 위에는 참가자 이름이 빼곡히 적힌 메모장이 있었다.
하림의 이름 옆엔 ‘심리 불안, 제거 1순위’
그의 표정은 마치 편집자처럼, 필요 없는 문장을 지우는 얼굴이었다.
불은 꺼져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람… 웃었어… 내 눈앞에서…
나만 다시 보고 있는 거야…”
눈물이, 무언의 절규처럼 떨어졌다.
그녀는 벽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샤워를 마친 그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엔 오래된 상처 자국들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누구 하나 죽는다고 안 놀랄 준비는 돼있어.
근데 누굴 살릴 건지는… 그건 아직 모르겠네.”
장롱을 열어 안에서 부적이 그려진 천 조각을 꺼냈다.
그 안엔 ‘의사’라고 적힌 종이가 함께 있었다.
“1장이네. 이걸 여기 지도에 있는 집에 붙이면…
살인은 실패한다. 살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냥꾼 같은 역할은… 없나?”
그는 바닥에 웅크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금지된 행위라는 것쯤은 이미 신경 쓰지 않았다.
담배 연기 너머로, 그는 오래된 사제칼을 꺼내 들었다.
“사람 잡는 거 누가 먼저 시작할까.
어차피 죄 없는 놈부터 죽어나갈 텐데.”
그의 눈빛은 냉철함을 가장한 분노였다.
그의 역할을 경찰이었다.
그러나 법은 이미 그의 신념을 떠난 지 오래였다.
혼잣말을 하며 벽을 향해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 내가 만든 게임이라고.
내가 이 흐름을 설계했어.
아니면 말고.”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의 눈은 농담이 아니었다.
임주희 스물여덟
“어? 나… 의사였네?”
임주희는 종이를 들고 멍하니 중얼였다.
그녀의 손엔 ‘직업 카드’와 함께 작은 부적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이곳에선 특정 직업에게만 ‘부적’이 지급된다.
의사의 부적은 단 한 번, 자신이 죽지 않도록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단, 방 안의 ‘지도’에 부적을 붙여야만 효력이 발휘된다.
그리고 붙인 그날 밤, 마피아의 타겟이 되어도 단 한 번은 살아남을 수 있다.
임주희는 손에 쥔 부적을 한참 바라보다,
벽에 걸린 마을 지도로 다가갔다.
지도엔 참가자들의 방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여기다 붙이면 되는 거 맞겠지?”
“나 언론인이야?
완전 내가 좋아하는 거잖아! 대박!”
그는 방 안을 뛰어다니다시피 하며 좋아했지만,
이내 조용히 앉아 중얼거렸다.
“완벽한 추리로 다 파악해주겠어…”
그의 눈은 어리지만, 어디선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10명의 마피아 중 일부가 마주 앉아 있었다.
가면을 쓴 그들은 이름 대신 숫자로 불렸다.
마피아 4번 (남성): “누구부터 갈까? 센 놈 먼저 없애야지.”
마피아 7번 (여성): “하림? 상태가 불안정해. 근데… 저런 애가 진실을 볼 수도 있어.”
마피아 1번 (냉정한 톤): “류태림. 놔둬. 지금 제거하면 역효과야.”
말끝에, 투표가 시작되었다.
누가 죽을지는 화면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말은 분명했다.
“그걸로 하지.
그리고… 내일은 여론을 조작할 준비도 해.
사람들, 금방 미쳐간다.”
불 꺼진 방.
그는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
문이 열린다.
조용한 발소리. 숨죽인 그림자.
“퍽.”
한 번의 타격.
그리고 피 튀기는 소리.
화면에는 피가 튄 벽만 보일 뿐, 얼굴은 나오지 않는다.
그림자만이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를 느낀 듯, 눈빛이 변했다.
그의 감각은, 지금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을 말없이 감지하고 있었다.
“죽은 건 누구인지보다,
그 죽음이 누구에게 이득인지 먼저 생각하라.”
아침 7시.
햇살이 서서히 마을 지붕 위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새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죽음은 소리를 삼킨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이었다.
갑자기 누군가의 절규가 마을을 가른다.
“여기요! 사람 죽었어요!”
잠결에 눈을 비비던 사람들,
세수도 하지 못한 얼굴로 하나둘 뛰어나왔다.
공포에 질린 표정, 맨발, 반쯤 벗겨진 슬리퍼.
모두가 공포를 실감하는 순간,
마을의 식당 옆 창고 앞에 시체가 놓여 있었다.
피.
깨진 머리.
옷에 번진 붉은 자국들.
“진짜네… 진짜 죽었어…”
“이거 그냥 설정 아니었어?”
“카메라 어딨어? 이거 방송 아니야?”
누군가는 외쳤고, 누군가는 눈을 피했다.
누군가는 이미 울고 있었고, 누군가는 침묵으로 오열하고 있었다.
박태우는 누구보다 먼저 시체 곁에 무릎을 꿇었다.
손끝으로 맥을 짚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죽었어. 이건 연출이 아니야.”
“누군가, 제대로 노렸어. 뒤통수 정타. 급소.
완전히 의도된 살인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구토 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무너지는 현실감.
누군가 입술을 깨물며 눈을 돌렸고,
누군가는 벌써 하림 쪽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김하림은 아무 말 없이 시체를 바라보다, 떨리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 사람… 내가 봤어요… 어젯밤… 문 여는 거…”
누군가 다가와 되물었다.
주성철
“누구였는데요? 봤다면서요? 누군데요?!”
하림은 대답하지 못했다.
박병철
"야 왜 대답을 못해 봤다며 어??"
김하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때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애잖아. 어제부터 계속 중얼거리던데.”
사람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그 말은 곧, 방향 없는 공포에 방향을 부여했다.
의심은 빠르게 형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차민재.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머니 속 녹음기의 불빛이 조용히 깜빡이고 있었다.
류태림은 말없이 그 모든 걸 관찰하고 있었다.
하림을 바라본 사람들의 눈빛,
놀라운 척하지만 실제로는 무표정한 발끝,
무심코 시체를 등진 사람의 시선 궤적.
그는 느렸다. 그러나 누구보다 깊었다.
“범인은 이곳에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죽음이 만들어낼 감정의 흐름이다.”
그리고 그 순간,
마을에 다시 스피커가 울렸다.
“사망자 1명 발생.
낮 투표는 오늘 오후 5시에 진행됩니다.
감정은 곧 단서입니다.
진실은… 항상 감정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
누구도 믿지 않았다.
아무도 신뢰하지 않았다.
오직 두려움만이, 서로의 숨결에 스며들고 있었다.
오후 3시.
태양은 높게 떠 있었지만, 마을엔 그늘만 가득했다.
사람들의 걸음은 무거워졌고, 말은 더 무거웠다.
이제 대화는 정보가 아니라, 방어였다.
박태우는 더는 참지 않았다.
광장 한복판으로 나와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젯밤 누구 숙소 주변에서 수상한 거 본 사람 없어?
지금 말 안 하면, 너도 용의선상에 올라가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울림보다 명령에 가까웠다.
백하윤이 한 손을 깔끔하게 턱에 얹고 웃었다.
“공포에 빠진 사람들 특징이 있죠.
가장 말 많은 사람을 미워하고,
가장 조용한 사람을 죽입니다.”
“당신은 뭐죠? 경찰놀이 하려고 나온 거예요?”
박태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적어도 나는 도망 안 가요.”
둘 사이 공기는 날카로웠다.
주변 참가자들은 숨을 죽였다.
누군가는 하림 쪽을, 누군가는 태우 쪽을 바라봤다.
한편, 김하림의 옆엔 조심스럽게 주성철이 앉았다.
“아까… 뭐 봤다고 하셨잖아요. 혹시 기억나요?
누군지, 조금이라도…”
하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이… 날 보고 웃었어요.
나한테만.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
“기억나면… 죽을 것 같아요.”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눈은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주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정동진은 광장 기둥 뒤에 기대선 채 담배를 문다.
“직감은 가끔 진실보다 정확하지.
문제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거지.”
그는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의 마음속 균열이 조금씩 들리는 듯했다.
류태림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은 멈추지 않았다.
말의 리듬, 시선의 굴절, 숨소리의 간격.
그는 무엇이 감정이고, 무엇이 조작인지 구분하고 있었다.
“사람은 말을 조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의 흔적은 본능이 남긴다.”
오후 5시가 가까워질 무렵.
스피커가 다시 울렸다.
“오후 5시, 첫 투표가 시작됩니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참가자 1명은 공개 처형됩니다.
당신이 오늘 하는 선택이,
내일의 공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참가자들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움직였다.
투표장은 조용했다.
종이와 펜만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각자의 감정은, 펜 끝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펜은,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