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
햇살은 어제와 똑같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빛이 닿는 얼굴들은 더 이상 평온하지 않았다.
긴장으로 말라붙은 표정들, 조심스레 걷는 발걸음, 그리고 마주치는 눈길마다 담긴 공포.
마을에 아침이 와도, 삶의 온도는 이미 얼어붙어 있었다.
“어젯밤, 안타깝게도 시민 3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정적을 깨고 울린 방송 기계음은, 인간의 언어처럼 차갑고 또렷했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거칠게 튀어나오고, 누군가는 아예 숨을 멈췄다.
공포가 아니라 불신 때문이었다.
죽은 사람보다, 남은 사람들을 더 두려워하는 아침이었다.
류태림은 조용히 선 채, 무표정한 얼굴로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들었다.
딸깍. 딸깍. 딸깍.
불안이 손끝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한 달도 못 버티겠는데…”
그는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이며, 손 안의 볼펜을 마치 무기처럼 움켜쥐었다.
김하림의 숙소 앞 – 동이 틀 무렵
하림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말이 없었고, 인기척도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 앞에 다가와 흰 국화꽃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꽃은 땅과의 접촉을 알리는 듯, 가볍게 흔들렸다.
슬픔조차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곳에서, 그 꽃이 할 수 있는 애도는 그것뿐이었다.
곧이어 작은 전자패드가 켜졌다.
희미한 푸른 빛이 문 앞을 감싸고, 기계음이 무덤처럼 차갑게 울렸다.
“전일 투표 결과, 처형된 대상: 김하림
정체 확인 결과: 시민 (조현병 환자 / 진실 발화 가능자)”
짧은 전자음.
화면이 꺼짐과 동시에, 침묵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죽음.
그 말은 살아 있는 모든 이의 신뢰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한 사람, 두 사람.
모퉁이에서 이 장면을 바라보던 이들이 눈을 돌린다.
서로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의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며 뒤로 물러선다.
공동 식당 – 아침 식사
오늘의 식당은 달랐다.
분위기도, 동선도, 말투도.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았지만, 사람들은 마치 낯선 식당에 들어온 듯 긴장하고 있었다.
자리 사이의 간격은 전날보다 훨씬 넓어졌다.
마주 앉은 이들조차 서로의 눈을 피했고,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어색하게 떠돌았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어떤 감정은 조용히 머물지 않는다.
“진짜… 시민이었다고? 하림…?”
참가자 A의 말은 식탁 위에 비수처럼 떨어졌다.
쓴웃음을 지으며 숟가락을 내려놓던 참가자 B가 중얼댔다.
“그러니까… 진실 말하는 사람이 먼저 죽는 세상이네.”
그 말에 누군가가 들끓던 감정을 터뜨렸다.
“어제 찍은 사람들… 뭐 할 말 없어요?”
잠깐의 침묵.
그 침묵은 죄책감도, 방어도 아닌 공포의 결과였다.
그때 또 다른 참가자 D가 외쳤다.
“들었어? 어젯밤에도… 3명이나 죽었다고!?”
말이 터지자, 그제야 식당은 웅성임으로 뒤덮였다.
“우리 각자 살아남아야겠는데요?”
“아까 우리 집 잘 보니까… 무기도 있더라고요.”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다.
누군가는 젓가락을 놓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누군가는 멍하니 앉아 식은 밥을 입에 넣었다.
어떤 이는 갑작스러운 과호흡으로 쓰러졌고, 또 어떤 이는 벽을 짚은 채 비틀거렸다.
아침 식사였던 자리가, 어느새 공포 훈련장이 되어 있었다.
믿음을 버리고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누군가를 믿다가 죽을 것인가.
그 선택의 그림자가 모든 이의 얼굴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광장 대립의 시작, 기록의 그림자
박태우는 식당 문을 조용히 열고 나왔다.
찬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기 전,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입에 문 담배는 불을 붙이기도 전에 이미 무거운 고백처럼 걸려 있었다.
불꽃이 담배 끝을 스쳤을 때, 뒤에서 고운 구두 소리가 따라붙었다.
백하윤이었다.
그녀는 한 손에 종이컵을 들고, 조용히 그의 옆에 멈췄다.
커피는 식었고, 말은 날카로웠다.
“오전부터 참 적극적이네요.”
그녀는 태연하게 첫 말을 꺼냈다.
“어제 그렇게들 하림 찍더니, 표정이 안 좋아요?”
박태우는 잠시 그녀를 쳐다봤다가 고개를 돌렸다.
담배 연기가 겨울 햇살을 가르며 위로 피어올랐다.
“…그 애가 진짜 시민이었다면…”
그는 낮게 말했다.
“우리가 어제 무슨 짓을 한 건지 생각해야지.”
백하윤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엔 감정도, 동의도 없었다.
오히려 매끈한 판단력만 남아 있었다.
“그게 윤리인가요?
감정으로 찍어놓고, 결과 보고 후회하면 그게 윤리입니까?”
그 말은 질문이라기보단 선언처럼 들렸다.
사람은 어차피 감정으로 움직이고, 그 뒤에야 비로소 윤리를 끌어다 붙인다는 냉소.
박태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담배를 꺾었다.
“적어도… 후회라도 하는 게 사람이지.”
그는 담배를 발로 비비며 껐다.
표정은 굳었고, 목소리는 무거웠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말보다 감정이 먼저 흔들렸고, 감정보다 의심이 먼저 침투했다.
멀찍이 떨어져 서 있던 한 인물, 참가자 B는 조용히 손에 쥔 노트를 펼쳤다.
그들은 들키지 않게, 하지만 분명히 그 대화를 들었다.
펜이 흘러간다.
— 박태우: 감정폭발형
— 백하윤: 냉정 분석형 (조작 의심)
글자 하나하나가 조용히 광장의 허공을 가르며, 새로운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도서관: 추적자의 독백
류태림은 조용한 공간을 찾고 싶었다.
누군가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먼저 울리는 공간.
그에게 도서관은 언제나 그런 곳이었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 안.
창문으로는 흐릿한 빛만이 들어오고, 먼지가 떠다니는 공기 속에서 시간도 멈춘 듯했다.
책상 위엔 메모지와 펜, 그리고 고요한 집중.
류태림은 어제의 상황을 되짚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패턴'을 보려 하고 있었다.
손끝이 종이 위를 타고 간다.
하림: 두려움 → 단서 제공 → 피살
백하윤: 감정 없음 → 논리적 비난 → 여론 유도
차민재: 표정 변화 없음 → 침묵 후 마지막 투표 발언
류태림은 펜을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았다.
생각은 고요했지만, 내면은 거세게 출렁이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였다.
“…정체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죽을 때, 누가 조용했는가…다.”
그 말은 그의 내면을 꿰뚫는 윤리이자, 스스로 세운 법칙 같았다.
진실은 말하는 자보다, 말하지 않는 자 주변에 있다.
살인은 대개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이 진실을 가리킨다.
류태림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침묵의 흔적을 추적할 준비를 마친 사람의 눈으로.
그리고 다음 메모를 쓸 준비를 했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를 추적하는 자만이
이 마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그는 가장 먼저 깨달은 자였다.
박병철의방 무력한 생존의 윤리
고요한 벽을 마주한 채 박병철이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엔 작은 생존 부적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희미한 금속성 광택이 감도는 그 부적은, 마치 마지막 남은 ‘선택지’처럼 보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벽을 바라봤다.
거기엔 어젯밤 투표 결과와 함께, 단 한 줄의 문장이 무표정하게 적혀 있었다.
[처형 대상: 김하림 | 정체: 시민 (조현병 환자)]
박병철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술을 움직인다.
“…우린 살인에 익숙해지는 중이다.”
목소리는 낮고, 지친 숨 사이에 섞여 흘렀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말이지.”
그는 손에 쥔 부적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자기에게 쓰지 않았다.
언제든 누군가를 살릴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그 ‘누군가’를 믿을 수 없었다.
이곳에선 그 누구도, 자신조차도 말이다.
시스템 방송: 윤리의 밤을 예고하다
[공지 방송 – 마을 전체 스피커를 통해 재생]
“오늘도 밤이 오면, 또 시민이 죽습니다.
감정이 선동이 되는 순간, 진실은 항상 가장 먼저 사라집니다.”
기계음의 톤은 여전히 일정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사람들은 ‘위협’보다 ‘사실’을 느꼈다.
진실은 가장 먼저 사라진다.
누가 만든 말이든, 이곳에선 진실이었다.
카메라는 광장을 높은 시점에서 내려다본다.
참가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했지만,
어제 죽은 사람의 무게는 모두의 어깨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누구도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더 무거웠다.
그 와중에도 류태림은 고요한 눈으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인다.
“…죽은 사람은 시민이었다.
그보다 무서운 건,
시민을 죽인 손이 지금도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 말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오늘의 진실이자 내일의 비극이었다.
박태우의 방 오전 10시
그 말에 박태우는 고개를 돌려 조사 명단에 펜을 들이댔다.
글씨가 망설임 없이 적힌다.
[조사 대상: 백하윤, 차민재]
이어진 시스템 리포트가 출력된다.
정보는 분명하지만, 해석은 누구에게나 달랐다.
백하윤: 언론인 / 조작 가능자 / 감정 분류 능력 상
박태우는 보고 있던 종이를 손으로 짚으며 낮게 읊조렸다.
“백하윤..언론인이였어..?”
도청자 구역 – 오전 10시 30분
마을 외곽의 폐쇄된 보건소 창고.
낡은 공간을 정동진과 이재훈이 도청실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었다.
벽면에는 무선 기기, 구형 리시버, 배터리 충전기와 케이블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건 감시의 기술이 아니라, 감시의 열망으로 엮인 배선들이었다.
이재훈이 어제의 이야기를 꺼낸다.
“난 어제… 백하윤 방에 마이크 심었어.
근데… 녹음이 다 삭제돼 있더라.”
정동진은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삭제할 줄 아는 사람이면… 그게 누구라는 뜻이지.”
이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에 빠졌다.
“오늘은… 류태림 어때?”
정동진이 낡은 카세트를 들고 배터리를 끼운다.
“좋지.
말 없는 애가 더 위험하지.”
그들은 아무 말 없는 자들을 향해 마이크를 들이댔다.
도청은 정보 수집이 아니라, 믿음의 붕괴를 미리 준비하는 의식이었다.
백하윤의방 – 오전 11시
마을 중심 정보센터.
한쪽 벽면엔 모든 참가자들의 얼굴 사진,
감정 반응 그래프, 투표 통계가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백하윤은 팔짱을 낀 채, 보드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다음 타깃은 정동진.”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허언증. 사람들 불안하게 해.
이런 인간 놔두면 나중에 ‘몰랐어요’ 하고 빠져나갈 수 있어.”
백하윤은 굳은 다짐으로 혼잣말은 한다.
“윤리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니야”
이 판에서 살아남고 싶으면,
먼저 누굴 밀어야 할지를 알아야 해.”
그 말은 룰이 아닌 생존의 문법이었다.
백하윤은 손가락으로 보드의 한 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동진 – 불안정 언행 / 정보 신뢰도 낮음 / 주관적 허위 진술 多
이 정도면… 적당히 믿을 거야.”
말은 정확했고, 표적은 정해졌다.
이곳은 진실을 판단하는 곳이 아니라, 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곳이었다.
조용한 전쟁
정동진의 방 오전 11:30
빛은 가늘게 들어오고, 방 안은 이상할 만큼 정돈돼 있었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지만, 공기조차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정동진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무표정했고, 목소리는 건조했다.
“오늘도… 사람 죽겠지.”
그는 마치 대사를 외우듯 말했다.
“근데 사람들은, 눈빛 하나, 말투 하나에 목숨 걸어.”
그는 웃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웃음보다 더 날카로운 무기였다.
혼잣말이었지만, 분명 누군가 들으라고 던진 말.
“웃긴 건 뭔지 알아?”
그는 시선을 살짝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난 진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거든.”
그 순간, 카메라 앵글은 그의 방 구석을 비췄다.
창문 틈 뒤편, 벽 모서리에 조심스럽게 고정된 도청 리시버 하나.
작지만 명확했다.
정동진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기계를 통해 다른 누군가의 방으로 전해질 것을 계산한 ‘연기’였다.
그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실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이 어딘가, 안전한 곳에 숨어 있었다.
류태림의 방 정오 12:00
류태림은 책상 앞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창가에 서서 바깥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거리를 본 것이 아니라, ‘구조’를 보고 있었다.
각 인물의 발걸음, 말투, 동선, 말의 순서, 침묵의 타이밍—all of it.
책상 위 벽에는 정리된 노트가 층층이 붙어 있었다.
각 인물은 분석된 문장으로 구분되었다.
그 문장들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하나의 미로였다.
백하윤: 여론 조작 가능성 높음 / 말의 순서 통제
정동진: 허언증이지만 진실도 말함 / 판 흔드는 자
차민재: 과하게 매끄럽다 / 정보 흡수형
그는 메모를 한 장 떼어내 손에 쥐고 중얼였다.
“경찰은 하루 두 명 조사할 수 있어.
의사, 언론인, 도청자, 심판관… 차근차근 끌어들여야 해.
그리고… 마피아를 잡아야 한다.”
그러나 심판관은 자신의 역할 을 다하지 않을 것 같다.
그의 사고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에서 출발했고,
윤리는 생존보다 우선이었다.
조용한 방 안에서, 류태림은 단 한 줄을 속으로 반복했다.
“말보다 더 빠른 건… 침묵의 방향이다.”
그는 단어로 판단하지 않았다.
표정도, 억양도 아닌—‘말하지 않은 순간’을 쫓고 있었다.
어느 방
카메라는 벽을 넘는다.
각기 다른 공간에서, 각기 다른 움직임이 이어진다.
어느 방에선 감정 보고서가 인쇄되고 있다.
용지 위에 정리된 표정 분석, 투표 반응 수치, 불안정 반응 비율.
기계음이 덜컥거리며 ‘인간’을 도식화하고 있다.
또 다른 방에선, 조사 명단 옆에 빨간 점이 찍힌다.
그 점은 생명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표시한다.
그리고 또 다른 방에선, 벽지 뒤편으로 도청기가 설치되고 있다.
누군가의 방에 숨겨진 리시버는 오늘 밤 또 하나의 진실을 삼킬 준비를 마쳤다.
그 모든 방의 공통점은 하나—
모든 사람이 ‘누군가’를 향해 칼끝을 세우고 있다는 것.
(류태림 속마음)
“…이 세계에선
윤리를 말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죽는다.
그래서, 그 말은…
조용히 준비되어야 한다.”
침묵은 말보다 빠르고,
의심은 사실보다 오래 남는다.
그것이 이 마을의 법이었다.
이제 밤이 온다.
다음 희생자는, ‘정말로 말하지 않았던 자’일까?
아니면, ‘말을 가장 정직하게 한 자’일까?
류태림은 그 답을 알기 위해, 한 글자씩 구조를 짜고 있었다.
죽이지 않기 위해, 오늘도 그는 감시자가 된다.
밤 11:00 / 둘째 날 살인 발생
마을 전경 – 밤, 정적
마을은 숨을 멈춘 듯 고요했다.
가로등 불빛이 노랗게 퍼져 있었지만, 그 빛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커튼 뒤편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밤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었다.
이곳에선 밤이 곧 명령이었고, 침묵은 공포였다.
[기계음 – 마을 방송 시스템]
“밤이 되었습니다.
범죄자는 깨어났습니다.”
기계음은 이질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일상의 일부처럼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진짜 어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범죄자 회의 공간 – 지하 창고
지하 창고.
축축한 바닥과 닿은 공기는 무거웠고, 조명이 없었다.
단 하나의 오래된 등불이 테이블을 비추고 있었다.
테이블 주변에는 세 명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검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고, 그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숫자만—2번, 5번, 9번.
그들은 말하지 않으면 죽는 자들이었고,
말을 해도 드러나선 안 되는 자들이었다.
마피아 2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동진은 내일 처리될 거야. 하윤이 밀고 있잖아.”
말투는 빠르지 않았지만 단호했다.
살인을 회의하듯, 매우 논리적으로 이어갔다.
마피아 5번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오늘은 누구?”
짧은 침묵.
조직에선 말보다 ‘정적’이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 정적을 마피아 9번이 깼다.
“박병철은 내버려둬.
무력 있고… 못죽일 가능성도 있어.”
그는 눈을 가린 가면 너머로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태림은 건들지 마.
지금 너무 민감해져 있어.
뭔가 눈치챘어.”
마피아 2번이 다시 말한다.
“…그럼, 이재훈?”
말은 칼끝을 쥐는 것과 같았다.
잠깐의 숨 고르기.
그 누구도 쉽게 결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피아 5번이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추리 능력 있고, 감정 눈치 빠름.
오늘 잘라야 하는 건… 그쪽이지.”
셋은 동시에 종이 위에 X자를 그었다.
한 사람의 이름이 사라졌다.
아무도 그를 죽였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이미 그는 살아 있지 않았다.
이재훈의 숙소 밤 11:20
어둠이 방 안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이재훈은 작은 등불 하나 아래,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목을 천천히 푸는 듯한 동작을 했다.
긴장감을 풀기보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한 준비처럼 보였다.
창밖은 고요했고,
그러나 그 고요 속에서 그는 무언가를 예감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오늘 또 움직일 거다.”
그의 목소리는 혼잣말 같았지만,
그 속엔 경계심이 분명히 실려 있었다.
“어제보다 더 조용하게.”
그는 창틀에 조그마한 유리 조각을 붙였다.
누군가 문을 열면 떨어지게 하기 위한 장치.
들키지 않기 위해선, 먼저 감지해야 했다.
그는 책상 서랍을 닫고, 등불을 끄고,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숨소리를 죽이고, 감각을 넓혔다.
그러나—
찰칵.
문이 열리는 소리.
그 미세한 금속음은 그의 예감을 증명했다.
딸그락.
유리 조각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다.
그 순간,
“왔군.”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이재훈은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뒤통수에 무언가가 강하게 날아들었다.
퍽.
그의 몸이 흔들리며 벽에 부딪힌다.
피가 튀고, 침묵은 더 깊어진다.
그를 쓰러뜨린 인물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가면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인물은 조용히 문을 나선다.
남은 건 피.
그리고 깨진 유리 조각.
그리고 끝내 울리지 않은 이재훈의 도청 리시버.
류태림 방 – 같은 시각
류태림은 등을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모든 감각을 잠시 닫은 듯 보였지만,
그건 단지 집중의 다른 형태였다.
그러다—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책상으로 다가가 메모지 한 장을 꺼냈다.
펜이 종이를 긋는다.
그는 한 줄을 남긴다.
“이재훈, 다음 순번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줄은 미래를 예측한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사실을 정리하는 ‘지연된 기록’이 되고 있었다.
류태림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어둠은 말이 없지만, 사람을 먼저 삼킨다.
방 너머의 세계
다른 방에서는 감정 보고서가 인쇄되고 있었다.
다른 방에서는 조사 명단 옆에 또 다른 이름 옆에 붉은 점이 찍힌다.
다른 방에서는 도청기가 교체되고, 벽 틈 사이에 숨겨지고 있었다.
그 누구도 소리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살인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이가, 누군가를 향해 칼을 들고 있었다.
류태림 (속마음)
“이 세계에선…
윤리를 말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죽는다.
그래서, 그 말은… 조용히 준비되어야 한다.”
다음 날 아침 6:30 / 죽음 이후의 침묵
마을 전체 새벽 6:30
아침은 정확히 찾아왔다.
그러나 이 마을의 아침은 더 이상 새로운 시작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과의 고지였다.
[공지 방송 – 기계음]
“사망자 발생.
이름: 이재훈77번 외 시민 2명.
역할: 도청자 / 감정 기반 생존 추적자.”
“그는 말없이 듣는 자였고,
진실을 모으는 중이었습니다.”
“불쌍한 시민과 도청자가 돌아가셨습니다.”
방 안에 고요가 흘렀다.
그러나 그 고요는 애도도, 슬픔도 아니었다.
그저 '다음은 누구인가'를 묻는 침묵이었다.
류태림은 작은 봉지에서 과자를 하나 꺼내 입에 넣었다.
달지도 짜지도 않은 무맛의 과자.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과자 부서지는 소리만이 방 안에 울렸다.
그것이, 오늘 아침 가장 큰 소리였다.
마을 광장 아침 7:00
광장은 차가운 안개에 덮여 있었다.
모두가 모였지만, 아무도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죽은 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은, 침묵으로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눈빛은 칼날이었고, 주먹이 아니라 시선으로 서로의 목을 졸랐다.
박태우가 입을 열었다.
“…이재훈… 눈치 빨랐지.”
그 말에 백하윤이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 어제 정동진 도청하려던 애 아니었나?”
차민재는 팔짱을 낀 채 낮게 웃었다.
“이래서 정보 가진 자는 오래 못 살아.”
그는 말 끝에 살짝 눈을 들어 하윤을 바라봤다.
그러나 하윤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더 깊은 눈빛으로, 무언가를 짚어내려는 듯 바라봤다.
그때 주성철이 조용히 말했다.
“역할이 분명하게 보이면… 살해 대상으로 찍히는구나.”
말은 맞았다.
이곳에서 애매한 자는 살아남고,
뚜렷한 자는 죽는다.
류태림은 광장의 끝에 혼자 서 있었다.
한 손을 이마에 얹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는 모두를 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숫자와 단어, 구조와 움직임이 동시에 맴돌고 있었다.
죽은 사람들, 타이밍, 표정, 말의 순서, 침묵의 길이.
류태림 – 속내
“진실에 가까운 사람부터 죽어나간다.
내가 죽을 확률… 10%.”
그는 그 수치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수치를 계산하는 자로 남고 싶었다.
죽는 자가 아니라, 판단하는 자로.
이재훈의 방 – 동시간
이재훈의 방은 정리된 채 그대로였다.
등불은 꺼졌고, 창문은 닫혔다.
죽음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책상 위에는 단 하나의 물건이 남아 있었다.
작은 녹음기.
불이 들어오고, 그가 남긴 마지막 음성이 재생된다.
이재훈 – 녹음된 목소리
“야 그 이상한 시민들 중에
하얀 옷 입고 앉아 있던 놈,
그놈 뭐하는 놈인지 알아?”
“그놈 위험해.
내가 예전에 그놈 때문에 잡혔잖아.
조심해, 다들.”
“그 자식 머리 좋으니까…
눈치 못 채게 행동하고 처신해.”
정적.
그 목소리는 마치 마피아 내부의 대화를 포착한 것 같았고,
그 속엔 이름 없는 누군가에 대한 실명 공포가 실려 있었다.
녹음은 끝났고, 마을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그 음성이 의심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