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역할을 말하는 사람들

마피아

by 아르칸테

밤 11시
마을은 다시 숨을 죽였다.
창문마다 불이 꺼지고, 집집마다 커튼이 내려앉은 시간.
이제 숨 쉬는 것조차 위험해지는 밤이었다.

그러나, 그 고요를 깨우는 메마른 전자음이 퍼졌다.

“지금은 밤 11시입니다.
범죄 가능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벽 1시까지 모든 범죄가 허용됩니다.”

짧고 건조한 알림이었다.
하지만 그 말 한 줄이, 이 마을 전체의 맥박을 바꾸었다.


마을 골목 – 동시에

누군가 움직이고 있었다.
발소리는 없었다.
모서리를 타고 도는 움직임은 그림자 같았다.

검은 후드를 눌러쓴 인물.
장갑 낀 손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발끝엔 ‘의도’가 있었다.

그는 멈춰 섰다.

시민 48번의 집.

잠금장치는 없었다.
도어락도 비밀번호도, 그에겐 장애가 아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시민 48번의 방 – 몇 초 후

방 안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이어폰을 낀 채 침대에 앉아 있는 시민 48번.
목을 흔들며, 무언가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정적.

이어폰 선이 끊긴다.
귀에 꽂힌 음악이 뚝 멎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목덜미에 냉기가 닿았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낮은 속삭임이 들린다.

“너는 나보다 더 미쳤구나.”
“…그래도 뭐, 행복하게 갔겠다.”

그 다음은,
감각조차 느낄 틈 없는 속도.

단검이 허리 뒤를 파고든다.
피가 순식간에 옷을 적셨고,
그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천천히 무너졌다.

손끝만이 마지막 떨림을 남겼다.
그의 숨은, 말없이 꺼졌다.

그리고—
살인자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류태림의 방 – 그 시각

류태림은 창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찬 공기가 천천히 그의 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을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엔 수첩, 그 아래 손전등.
은은한 빛이 손글씨를 드러낸다.

“지금 움직이는 자는, 본능이 아니라
사전 시나리오를 가진 자다.”

그는 한 줄 이름에 조용히 동그라미를 그었다.


조진혁의 방 – 같은 시각

조진혁은 혼자였다.
불을 꺼둔 채, 의자에 앉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 어딘가를 꿰뚫고 있었다.

“그들이 또 움직인다…
근데 오늘은… 죽이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


마을 후문 인근 – 골목 뒤편

주성철은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손에는 식칼이 하나 쥐어져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편지하나가 있었다.

“…조심해. 누군가 널 보고 있어.”

그 말에,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숨결이 고르지 못했다.

그 순간—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스쳤다.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지나간 존재.
그러나 칼날은, 그의 살을 향해 오지 않았다.
그 그림자는 방향을 틀어 사라졌다.

주성철은 식칼을 쥔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아직… 아직은 아니다.
내가 잡아야 해.”

그는 누군가를 추적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또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밤, 살인은 그를 지나쳐갔다.


박병철의방 – 새벽 12시 40분

박병철은 고요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손엔 종이 한 장.
그 위엔 의료 기록이 아니라, 예감이 있었다.

“누구를 살릴 수 있을까…
아니, 누구를 살려야 하지…”

그는 손을 떨며 누군가의 집에 부적을 붙인다.

“아자 아자 소리지르며 자신의 감을 믿는다."


새벽 1시
마을 전체에 또 한 번 기계음이 울렸다.

“범죄 가능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오늘 두 명의 시민이 사망했습니다.
정의로운 의사 덕분에, 한 명은 살아났습니다.”

단 한 문장.
그러나 그 문장이 전하는 건,
안도의 한숨새로운 두려움이었다.

각자의 방.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누구도 쉽게 숨을 내쉬지 못했다.

오늘 누군가는 죽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살인을 외면했다.
혹은 지켜보았다.

침묵의 살인은 끝났지만,
그 여운은 마을을 더 깊은 암흑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새벽 1시10분

정적을 찢고, 갑작스럽게 벽면 스크린이 일제히 켜졌다.
참가자들의 방 안.
어둠 속에서 텔레비전 화면만이 유일한 빛이 되었다.

화면은 흑백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이 영상이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모두가 직감했다.

찌—익.
[감시 영상 재생 중입니다.]

스피커는 평온하게 말했지만,
그 안에 담긴 정보는 끔찍한 잔혹이었다.

영상 1.
시민 33번의 방 – 새벽 12시 11분

카메라는 방 구석 천장에 있었다.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복면.
그리고 도끼.

그 뒤로는 쇳소리를 내며 굴러오는 망치.
그 모든 게 ‘살의’를 증명하는 물리적인 언어였다.

시민 33번은 놀라 일어났지만,
몸을 가누기 전에 도끼가 머리 위로 들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이크는 꺼져 있었지만,
모든 시청자는 그 묵음 속 비명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읍…”

그의 몸은 무너졌고,
복면의 인물은 정확한 한 방으로 끝을 냈다.
잔혹했지만, 의외로 ‘서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몸을 숙이고, 걸음을 헛디디는 모습.

그는 무언가에 쫓기듯 방을 빠져나갔다.

영상 2.
시민 48번의 방 – 새벽 12시 38분

화면 전환.
이번엔 또 다른 방.
또 다른 사망자.

조용한 음악이 들리지 않지만,
이어폰을 낀 시민 48번의 고요한 움직임으로
그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상태였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문이 열린다.
이번엔 장갑, 후드, 그리고 단검.

영상 속 침입자는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
움직임엔 망설임이 없었고,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는 곧바로 시민의 등 뒤로 다가간다.
그리고—
딱 한 번.
단검이 허리 뒤쪽을 찔렀다.

정확했다.
조용했다.
그리고, 되돌릴 수 없었다.

그는 시민이 무너지는 동안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화면 하단 자막

[희생자: 시민 48번, 시민 33번]
[역할: 일반 시민 / 능력 없음]

한 줄의 문장이
모든 것을 끝냈다.

아무 능력도 없었던 시민 두 명이,
누군가의 설계에 따라
완벽하게 제거당했다.





참가자 각자의 방 – 영상 직후

임주희.
영상이 끝나자마자 눈을 감았다.
입술이 떨렸다.
그리고… 참았던 감정이 터지듯, 오열이 시작됐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울대가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의 울음은 작게, 그러나 깊게 울렸다.

박병철.
영상이 꺼지자, 아무 말도 없이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다시, “쾅.”
말도 없고 눈물도 없었지만,
분노는 육체로 번역되었다.

차민재.
TV를 껐다.
정적.
그런데 이내 다시 켰다.
잠시 멈추고, 다시 껐다.
그는 생각 중이었다.
무언가를 계산하고, 곱씹고, 되짚고 있었다.

백하윤.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영상이 끝난 후에도
꺼진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눈썹이,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조진혁.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1명… 너무 조용하게 죽였다.”

그 말은 경탄도, 경계도 아니었다.
그저, 분석이었다.






주성철.
눈을 감았다, 떴다.
침대 모서리를 꼭 잡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뭐야 ????”

“내가…..살았잖아”

자기 목숨이 아니라,
누군가 대신 죽은 것 같았다.
그 죄책감과 혼란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자의 무게였다.

박태우.
한참을 화면만 바라보다,
손을 조용히 무릎에 올렸다.
그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성태우…”

입술을 떼지 못하고, 침묵에 빠졌다.
동생 같은 존재.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더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류태림의 방 – 영상 종료 직후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영상이 끝나자, 리모컨도 없이
직접 버튼을 눌러 한 장면을 반복 재생했다.

조용히.
눈동자만 움직이며.
마치 범인의 숨결이라도 찾아내려는 듯.

그러다가—
그의 눈이 번뜩였다.

“…어? 주성철, 살았네?”

그 말은 놀람이자 안도였고,
동시에—
의사의 활약에 대한 경의였다.

그는 곧 수첩을 열었다.
펜을 들어 한 줄을 적었다.

“시민 생존. 예상 외 반전.
의사가 제대로 움직였다.

의사가 어떤 시민을 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내일은 또…
누구의 차례인가.”

글씨체는 단정했지만,
그 문장에 담긴 무게는 단단했다.

그는 잠시 멈춰, 수첩을 덮었다.
창문 밖은 여전히 어둠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어둠 속에서 ‘누가 죽였는가’보다
‘누가 지켜보고 있었는가’가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