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팔자

by 아르칸테

에필로그 – 마지막 그리고 시작

봄이 다시 왔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흘러가는데, 영란의 시간은 조금 느리다.
이제는 무릎이 성치 않아 걸음이 느려졌고, 손등의 핏줄은 마치 세월의 지도를 그려놓은 듯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만은 여전히 그때, 7공주 시절의 불꽃이 남아 있었다.

“세상 참 웃기지?
그때는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였는데,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래.”
영란은 허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새벽이면 라디오를 켜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조용히 옛날 노래를 듣는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그 노래만 나오면 마음이 이상하게 저려온다.
그 노래의 가사를 따라 부르다 보면,
그때 그 사람이 떠오른다.
그녀에게 노래를 남기고 사라진 남자.
그녀를 울리고 웃기던 세상의 모든 남자들.
그리고 결국 자신을 키운 운명이라는 이름의 괴물.

“팔자라고 하더라.
근데 말이야, 팔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끝까지 버티는 놈이 만드는 거래.”

그녀는 늘 그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누가 뭐라 해도, 영란은 끝까지 버텼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가족에게 이용당하고, 세상에게 조롱받아도
결국 끝까지 ‘자기 사람들’을 지켰다.
그게 영란이었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제 삶을 산다.
멀리 호주에 있는 큰딸은 가끔 영상통화로 손주를 보여주며 웃는다.
“엄마, 이제 좀 쉬어요.”
영란은 대답 대신 커피를 들었다.
“나는 이미 쉬고 있지, 니가 웃는 거 보잖아.”

창문 밖, 민들레 한 송이가 흔들린다.
누군가는 잡초라 부르고, 누군가는 봄의 첫 얼굴이라 부른다.
영란은 그 민들레를 보며 혼잣말했다.
“나도 저거 같지. 아무 데서나 피고, 아무 데서나 잘 자라.”

그녀의 삶은 민들레 같았다.
사람들은 늘 ‘불쌍하다’, ‘대단하다’ 했지만,
정작 영란에게 그 말들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오늘도 내가 내 새끼들 이름 불러볼 수 있는가.”
그것뿐이었다.

밤이 깊어가자 그녀는 옛날 앨범을 꺼냈다.
사진 속엔 젊은 시절의 자신이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 번쩍이는 눈, 가죽자켓에 주먹을 쥐고 웃던 소녀.
7공주 시절의 영란.
그녀는 그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야, 너 참 잘 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불을 끄고,
라디오를 켜두고,
하늘을 향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세상 어떤 화장보다 아름다웠다.

그날 새벽, 바람이 살짝 들창문을 흔들었다.
민들레 씨앗 하나가 방 안으로 날아들어
그녀의 오래된 드레스 위에 내려앉았다.

누군가는 그걸 그냥 먼지라 했겠지만,
그건 분명 영란의 마지막 숨결이었다.
다시 태어날 누군가를 향한,
그녀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인생이란 말이야, 결국 팔자고,
그 팔자는..
끝까지 자기 마음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써내려가는 거야.”

영란의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들려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