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골목 상인
다음 날 아침,
학교 가는 길은 이상하게 더 좁아 보였다.
민수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 한가운데 돌덩이처럼 걸려 있었다.
그래도 어제 골목에서 들었던 말 때문에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버리지는 말자.
적어도 나는 먼저 버리는 사람은 되지 말자.’
그 생각을 붙잡고
교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안쪽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민수와 몇몇 애들이
창가 쪽에 모여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잠깐, 웃음이 끊겼다.
공기만 어색하게 남았다.
나는 최대한 평소처럼 걸어가
민수 책상 옆에 섰다.
“야, 민수야.”
민수가 나를 쳐다봤다.
눈빛은 어딘가 불안했고
그 불안 위에
허세 같은 게 덧칠되어 있었다.
“…왜.”
나는 숨을 한번 삼켰다.
“어제…
그 얘기 말인데—”
그때 옆에서 누가 끼어들었다.
“아, 그거?
니가 욕했다며?”
반 친구 중 하나인 재훈이었다.
어제 민수랑 같이 있었던 애.
재훈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야, 민수야.
쟤가 체육창고 앞에서
‘민수 요즘 잘난 척한다’고 한 거
내가 들었다니까?”
애들 몇이 킥킥거렸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했잖아.”
재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냥 들은 거 말한 건데?
야, 민수야.
니가 알아서 판단해.”
민수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곧 굳어버렸다.
“…그만하자.”
민수가 낮게 말했다.
“나 지금…헷갈리고 싶지도 않다.”
그 말은
나에게 이렇게 들렸다.
‘나는 너 대신 쟤 말을 믿겠다.’
머리 위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정과 의리가 깨지는 소리가
진짜로 귀 안에서 울리는 느낌이었다.
“야, 민수야.”
나는 마지막으로 불렀다.
“넌 나를 믿어줄 수는 없냐?”
민수는 눈을 피하며 말했다.
“…모르겠다. 잠깐 좀…거리 두자.”
그 말 한 줄이
가슴을 가로로 그어버렸다.
거리는
발자국이 만드는 줄이 아니라
마음이 만드는 선이라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수업 종이 울렸고,
선생님이 들어왔고,
칠판에 글씨가 적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 칠판에는
딱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민수가 나를 버렸다.’
그 문장은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방과 후,
나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발길이 알아서
골목 쪽으로 꺾였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골목길에는
낡은 간판 불빛들이
조용히 깜빡거리고 있었다.
천막이 보이자
나는 거의 뛰다시피 그쪽으로 향했다.
천막 문을 확 젖히고 들어가자
아저씨가 고개를 들었다.
“준호야.”
그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이상하게 오늘은
더 깊이 내려와 박혔다.
나는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저씨가 물었다.
“오늘은…얼굴이 ‘한 번 더 맞은 얼굴’이구만.”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형.이번엔 오해가 아니에요.”
“그래?”
“…진짜 배신당했어요.”
아저씨는
놀라지도 않고,
위로하려 들지도 않고,
그저 나를 한 번 더 바라봤다.
“그래.
말해봐라.”
나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오늘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말했다.
민수의 표정,
재훈의 말,
애들의 웃음,
그리고 그 한 문장.
‘잠깐 좀… 거리 두자.’
말을 다 하고 나자
가슴속 어딘가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형.
이건 그냥 오해가 아니에요.
민수가…
날 버렸어요.”
아저씨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냥 주전자만 들어
난로 위에 올려놓았다.
물 끓는 소리가
조용히 피어오르기 시작할 때쯤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그래.
배신이라.”
그는 지팡이를 세워
손바닥으로 천천히 두드렸다.
“준호야.
배신이 뭐라고 생각하냐.”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믿었던 사람이
뒤통수 치는 거요.”
“그게 다냐?”
“…내 편인 줄 알았는데
아닌 사람 되는 거요.”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대부분 그렇게 말하지.”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말이다.
준호야.
지금 제일 아픈 건
‘뒤통수 맞은 머리’냐,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마음’이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저씨가 대신 말했다.
“지금 네가 진짜로 느끼는 건
‘이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마음에
발목 잡힌 상태다.”
그 말은
내 숨을 멈춰 세웠다.
“…형.
누가 봐도 이건 배신이에요.”
나는 거칠게 말했다.
“민수가
나를 선택 안 했잖아요.
그게 배신 아니에요?”
아저씨는 피식 웃었다.
“그래,
너 입장에서는 분명 배신이지.”
“입장이라니요?
사실이잖아요, 사실.”
“사실은 이거다.”
아저씨가 손가락을 들었다.
“민수는
두려움과 눈치와 헷갈림 사이에서
제일 쉬운 선택을 했다.
그게 사건이다.”
“그게 더 나쁜 거잖아요!”
“맞다.
나쁘지.”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 부분은
민수의 몫이다.
그걸 좋게 포장할 필요는 없다.”
나는 잠시 멈췄다.
의외였다.
아저씨가 이렇게 말해줄 줄은 몰랐다.
“…그럼 됐잖아요.
걔 잘못이잖아요.”
아저씨는 그때
조용히 말을 돌렸다.
“근데 준호야.”
“…”
“민수의 잘못이 분명해질수록
넌 어떤 아이가 되냐.”
나는 성질이 치밀어올랐다.
“…뭐라고요?”
“지금 네 머릿속에
이런 문장이 떠오르지 않냐.”
아저씨는 내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역시 사람은 믿을 게 못 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확했다.
아저씨는 이어 말했다.
“배신은
상대가 만든 사건이다.
하지만 말이다—”
그는 지팡이 끝으로
내 가슴 위치를 톡, 쳤다.
“그 배신 때문에
‘사람을 다 혐오하는 아이’가 될지,
‘그래도 사람을 지키고 싶은 아이’가 될지는
네가 만드는 선택이다.”
그 말은
내 안에서
어딘가를 아주 세게 친 것 같았다.
“…형.
그게 그렇게 쉽게 나뉘어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한테 상처받았는데
어떻게 또 사람을 지켜요.
그건 바보죠.”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바보가 되는 건
사람을 믿어서가 아니라—
상처 준 사람만
머릿속에서 평생 다시 재생하는 거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너는
‘민수가 날 버렸다’는 장면을
계속 돌려보고 있다.
그렇게 보면
사람은 다 쓰레기가 된다.”
나는 이를 꽉 물었다.
“근데요 형.
솔직히 말해서,
안 그렇게 보이게 생겼어요?”
아저씨는 잠시 웃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처음엔 다 그렇게 본다.”
그리고 주전자를 기울여
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그래서 묻는 거다.
너는 이 사건 이후에
어떤 아이가 되고 싶냐.”
나는 멍해졌다.
“버림받았다고 믿는 아이로 살래?
아니면
배신당해도
자기 마음의 선까지는 안 버리는 아이로 살래?”
그 말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저씨는 내 표정을 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막 구석으로 가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 안을 뒤적이더니
손에 무언가를 쥐고 돌아왔다.
내 앞에 내민 것은
작고 낡은,
위가 반쯤 휘어져
제대로 들어갈 구멍도 없어 보이는
부러진 열쇠였다.
“…이게 뭐예요?”
아저씨가 말했다.
“배신이다.”
나는 더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보았다.
“부러진 열쇠는
이제 문을 못 연다.
맞는 구멍을 찾아도
제대로 돌리지 못한다.”
아저씨는 그 열쇠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배신도 그렇다.
다시 예전 그 문으로
들어가게 해주지는 못한다.”
나는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이상하게 차갑진 않았다.
그저 오래된 금속의 온도였다.
아저씨는 말을 이었다.
“근데 잘 봐라, 준호야.”
그는 천막 문을 턱 열어
바깥 어둠과 바람을 가리켰다.
“문은
민수가 지키고 있는 게 아니다.
네 마음의 문은
원래부터
네가 여닫는 거다.”
나는 숨을 멈췄다.
아저씨가 말했다.
“이 부러진 열쇠는
다시는 문을 못 연다.
그래서 알려주는 거다.”
그는 한 글자씩 끊어 말했다.
“‘남의 손에 네 마음의 열쇠를 쥐어주지 마라.’”
그 말은
어제, 그제 들었던 어떤 말들보다
더 깊게 내려왔다.
“민수가 널 버렸든,
오해했든,
눈치 보느라 네 편을 안 들었든
그건 다
민수 마음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아저씨는 조용히 마무리했다.
“배신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사건이고,
그 배신 이후에
‘네가 어떤 사람이 될지’ 고르는 건
네 몫이다.”
나는
부러진 열쇠를 쥔 손을
조금 더 꽉 움켜쥐었다.
억울함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서운함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도 사람 다 믿지 말아야지”
라고 내뱉으려던 말이
목구멍에서 조용히 멈춰섰다.
아저씨가 물었다.
“지금 기분이 어떠냐, 준호야.”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직 꽤 열 받고요.
그래도…
사람을 다 싫어하는 쪽으로
확 돌아서고 싶지는 않아요.”
아저씨는 그제야
조용히 웃었다.
“그 정도면 됐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을 덧붙였다.
“기억해라.
배신은
사람을 못 믿게 만들려고 있는 게 아니라—
‘그래도 나는 어떤 사람이 될지’
네 마음을 드러내라고 찾아오는 손님이다.”
그 말이
오늘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천막을 나설 때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주머니 속 부러진 열쇠가
작게 살을 눌렀다.
민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 용서도 안 됐고,
다시 잘 지낼 수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 가지는
조용히 정해진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사람을 너무 쉽게 버리는 쪽으로
넘어가진 말자.’
집 쪽으로 걸어갈수록
발걸음은 느려졌지만
생각은 조금 정리되었다.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쥐는 순간,
나는 잠깐 멈춰 섰다.
아빠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배신했다’는 말을
들어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덜 미워졌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아빠가 식탁에 앉아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서류 같은 것,
작은 공구들,
자잘한 부품들.
아빠는 나를 보더니
조금 놀란 얼굴로
수화로 물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냐.”
예전 같으면
귀찮다는 티를 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대답이 나왔다.
나는 수화로 말했다.
“그냥…
사람이랑 좀 싸웠어요.”
아빠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친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수화로 한 글자씩 말했다.
“사람이
제일 어렵지.”
쓸데없이 당연한 말인데 이상하게 가슴이 울렸다.
나는 그 말에
처음으로 정면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너무 쉽게 포기하긴
싫어요.”
아빠는
내 손동작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정말 오랜만에 입모양을 크게 만들었다.
고맙다는 말처럼 보이는 짧은 입술의 움직임.
나는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표정 하나만으로 알 것 같았다.
오늘 밤,
민수와 나는 아직 멀어져 있고,
아빠와 나 사이의 오해도
다 풀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해진 게 하나 있었다.
‘나는 배신 때문에 나까지 버리는 아이는 되지 말자.’
부러진 열쇠는 아무 문도 열어주지 못했지만
적어도 내 마음 안에
닫혀 있던 문 하나를 조용히 두드려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