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사랑이 시작되던 날

이상한 골목 상인

by 아르칸테

7장. 사랑이 시작되던 날

민수랑의 일은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어색한 숨이 먼저 멈췄고,
민수도 나도 서로를 못 본 척 잘도 지나쳤다.

사람들 사이에서 단 한 사람만 공기처럼 비는 느낌.
그게 요즘 학교였다.

그런 날 아침, 담임이 교탁을 두드렸다.

“얘들아, 오늘 전학 온 친구 있다. 같이 잘 지내보자.”

나는 고개를 들 생각도 없었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이름.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내가 버티는 것도 벅찬데
누군가를 더 외우고, 맞추고,
그럴 여유는 없다고 느끼던 때였다.

“자, 들어와라.”

문이 열렸다. 교실의 시선이 한꺼번에 문으로 쏠렸다.

나는 그냥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귀가 먼저 반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하린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어딘가 낯익었다.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앞에 서 있는 아이를 보는 순간,
가슴이 묘하게 쿡 찔렸다.

긴 머리를 반쯤 묶은 아이.
눈웃음이 자연스럽고, 말 끝이 부드럽게 떨어지는 아이.

초등학교 4학년,
창가에서 두 번째 줄.
지우개를 빌려주던 그 얼굴이
내 안에서 갑자기 또렷하게 떠올랐다.

‘설마…’

딴 애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하린이 내 쪽을 한번 훑었다.
진짜로,
딱 내 눈을 보고 조금 놀란 듯 눈이 커졌다.

“뒤에서 세 번째 줄, 창가 쪽으로 가자.”

담임이 자리를 가리켰다.
하린은 교실 뒤를 돌아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아주 잠깐이었는데
그녀의 발걸음이 내 책걸상 옆에서 멈칫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나갔다.

…그런데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일이 벌어졌다.

“저기…”

익숙한, 하지만 한동안 잊고 있던 목소리.

나는 엎드려 있다가 얼굴을 들었다.

하린이 내 자리 앞에 서 있었다.

“너… 혹시 김준호 맞지?”

심장이
말도 안 되게 시끄럽게 뛴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어? 어… 맞는데.”

내 목소리는 내 것 같지 않았다.

하린이 웃었다.

“야, 진짜 너구나. 나… 기억 안 나?”

초등학교 운동장,
비 오는 날 복도,
하굣길 문방구, 지우개, 빵,
시끄럽던 반 애들 소리.

잔상들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혹시, 그때 그… 이…”

내가 더듬거리자 하린이 먼저 말했다.

“이하린. 네 옆에 앉았던 애.”

말 끝에 붙는 웃음이 그때랑 똑같았다.

나는 어이없게 웃음이 나왔다.

“야… 진짜, 너냐.”

그 말이 최선이었다.

하린은 괜히 어깨를 으쓱였다.

“나, 전학 가고 나서
애들한테 가끔 네 얘기 들었어.
복싱 배운다며? 싸움 잘한다며?”

“그걸 왜…”

얼굴이 뜨거워졌다.

“근데, 난 되게 좋았는데.”

“뭐가?”

“맨날 짜증나 있는 것 같은데
애들 대신 혼나주고, 선생한테 찍혀도
할 말 다 하는 거. 멋있었어.”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는데,
내 안 깊은 어딘가를 조용히 긁어내렸다.

나는 그런 말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반가웠다. 같은 학교에서 다시 보니까.”

하린이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한동안 공책도 펼치지 못하고
멍하니 칠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멋있었다고?’

그 단어 하나가 오늘 하루를 통째로 바꿔버렸다.

그날 이후, 우리 사이에는
이상한 속도감이 생겼다.

쉬는 시간마다
하린이 내 자리로 오거나,
내가 괜히 그녀의 책상 근처를 맴돌았다.

“야, 너 아직도 초코우유 먹냐?”

“너 아직도 수학 싫어하냐?”

별것도 아닌 대화들이
하루를 채우기 시작했다.

하교길에는 집 방향이 조금 다름에도
굳이 중간까지 같이 걸었다.

“나 여기서 버스 타야 돼.”

“응. 버스 오기 전에 가면 안 됨.”

“어휴, 귀찮게 굴지 마라 진짜.”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린은 항상 버스가 오는 걸 확인하고서야 탔다.

버스 문이 닫히고
그녀가 손을 흔들면,
나는 혼자 남은 정류장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이게… 뭐지.’

기분이 좋았다. 아주 많이.

근데 동시에
어디선가 익숙한 두려움도 올라왔다.

‘이런 거… 언젠가 깨지는 거 아냐?’

좋은 건
늘 뺏기던 집.
마음 주면 돌아오는 건 대충이었던 관계들.

그래서였을까.

나는 행복해지는 속도보다
불안해지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우리…사귀는 거냐?”

어느 날 저녁,
학교 근처 작은 놀이터.
하교길에 그냥 앉아서
자판기 커피를 나눠 마시다가 하린이 먼저 물었다.

“뭐, 아닌 척해야 됨?”

나는 일부러 건조하게 말했다.

하린이 나를 한 번 빤히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야, 이런 데서 고백하면 안 된다. 로맨스 없다.”

“그럼, 어디서 해야 되는데.”

“글쎄.”

잠시 침묵.

흔들리는 그네 소리,
멀리서 들리는 차 소리,저녁 공기.

하린이 종이컵을 툭 치며 말했다.

“그냥… 이렇게 하자. 내가 내일 친구들한테
‘남자친구 생겼다’고 말해도 돼?”

가슴이 또 한 번 쿡 찔렸다.

“네 마음인데 뭐.”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던지듯 말했다.

근데 속으로는 미친 듯이 되뇌고 있었다.

‘제발. 제발 그렇게 말해줘.’

하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이제부터는 진짜로 싸우면 안 된다?”

“왜.”

“친구랑 싸우는 거랑 달라. 연인이랑 싸우는 건 더 힘들다.”

민수의 얼굴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장면을 애써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내가… 잘할게.”

그때는
진심이었다. 분명히.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연락이 당연해졌을 때부터였다.

“카톡 씹지 마라.”

“야, 아침에 왜 답 안 했어.”

“나 지금 학원 가기 싫어 죽겠다고.”

메시지들이 하루를 촘촘히 메웠다.

처음에는 좋았다.

누군가 나에게
하루를 보고하는 느낌.
나도 누군가에게
오늘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메시지 시간에
눈이 먼저 갔다.

“하린아, 왜 답이 없어.”

보낸 지 10분. 20분. 40분.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나한테 질렸나. 친구들이랑 있을 땐 내가 필요 없는 거냐.’

휴대폰 화면을
계속 눌러 켰다 껐다 하다가
결국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야, 그만하자. 우리 그냥 거기까지인 듯.”

보내고 나서 심장이 내려앉았다.

‘뭐 한 거야, 나…’

잠시 뒤, 답장이 왔다.

[뭐야 갑자기]

[왜 또 그 소리야]

문자를 읽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서둘러 다시 썼다.

“장난이야. 그냥… 피곤해서 그랬다.”

[너 그 말 장난으로 하지 마]

[싫어]

[그 말 들을 때마다 불안해져]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참 동안 천장을 멍하게 바라봤다.

‘나는 왜… 이렇게밖에 말을 못 할까.’

헤어지자는 말은 사실 진심이 아니었다.

‘떠날 거면 지금 떠나. 나를 정말 좋아하면 붙잡아봐.’

이상한 시험, 이상한 방어.이상한 그무언가…

내가 먼저 밀어내야
상대가 떠나도 조금 덜 아플 것 같은
유치한 계산.

그런데 그 계산이야말로
조금씩 사랑을 갉아먹고 있다는 걸 나는 몰랐다.

그 후로도 비슷한 일은 반복됐다.

사소한 말다툼 끝마다
나는 습관처럼 같은 말을 꺼냈다.

“됐어, 그만하자.”

“너랑 있으면 더 힘들어.”

“내가 문제인 거 알지? 그러니까 너도 알아서 해.”

말을 뱉는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내가 나를 때리고 있었다.

‘왜 또 이 말을 꺼냈어. 왜 또, 왜또!!!.’

그리고 언제나 같은 결말.

“미안. 방금 한 말 다 취소.”

“나 진짜…그러려고 한 말 아니었어.”

하린은 처음에는
그냥 한숨을 쉬고 웃으며 말했다.

“너 진짜… 말 좀 곱게 해라.”

“내가 버릇 고칠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정말로 고치고 싶었다.

하지만
화가 나거나 불안해지는 순간,
입은 또 같은 길을 택했다.

생각보다
습관은 의지보다 깊은 곳에 박혀 있었고,
내 감정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빨리 부풀어 올랐다.

어느 날이었다.

하교길, 날이 괜히 꿀꿀했다.
민수와 마주친 복도에서
서로 지나칠 때
어깨가 살짝 닿았는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묵직한 공기가 저녁까지 따라왔다.

하린이 내 옆에서 물었다.

“오늘 왜 그래. 말 없어.”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데.”

“그냥, 조용히 좀 가면 안 되냐.”

내 말투가 생각보다 훨씬 거칠게 나와 버렸다.

하린이 걸음을 멈췄다.

나는 그제야 뒤늦게 상황을 인식했다.

“야, 그냥 내가 좀…”

“준호야.”

하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너 힘든 거 알아.네가 집에서, 학교에서
뭐 겪는지도 대충은 알겠어.”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천천히 이어갔다.

“근데, 힘들다고 해서 나한테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건 아니야.”

가슴 한가운데가 퍽 하고 맞은 느낌이었다.

“난 네 편이야. 근데 네 편이라고 해서 막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나는 입을 열다가 다시 닫았다.

“나도 가끔 너한테 상처받아.”

그 말은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더 아프게 박혔다.

나는 그날 밤 늦게까지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다.

“하린아, 미안하다.”

“나 진짜 고치려고 하고 있어.”

“너 잃기 싫다.”

수십 번 메시지를 지우고,
다시 쓰고, 결국엔
짧게 하나만 보냈다.

[미안해. 나 또 말 헛나왔다]

한참 후에 답장이 왔다.

[알아]

[근데 나도 생각 좀 해야겠다]

[너한테 화난 게 아니라]

[내가 이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문장을 읽는 동안 눈앞이 조금씩 흐려졌다.

‘생각 좀 하겠다’라는 말은
“괜찮아, 넘어가자”보다
훨씬 무거운 말이라는 걸
나는 알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오래 바라봤다.

민수와의 끊어진 관계,
집에서의 팽팽한 공기,
그리고 하린의 마지막 메시지.

이 세 가지가 한꺼번에 목을 조여 왔다.

‘나는 왜 소중한 사람들한테 이상한 말만 할까.’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어디쯤에서, 하린 역시
자기 방 어딘가에 앉아
비슷한 표정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아이의 상처는 이해가 되는데, 그래도 이 버릇은
정말 고쳐야 한다.’

‘안 그러면 언젠가 정말 둘 다 망가질 거야.’

그 밤, 우리는 아직
서로를 좋아했다.
아직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가는 금이 생기기 시작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