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실연의 밤

이상한 골목 상인

by 아르칸테

8장.실연의 밤


하린과 마지막으로 말다툼을 했던 날,
나는 괜히 늦게까지 집 밖을 맴돌았다.

학원 앞 버스정류장,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
아무도 없는 골목 벤치.

앉아 있어도, 서 있어도,
몸이 아니라 마음이 가만있지를 못했다.

머릿속을 치고 지나가는 생각은 하나였다.

“이번엔 진짜 고칠게. 제발… 이번엔 버리지 말아줘.”

하지만 그 말은
한 번도 온전히 전해지지 못했다.
내 불안이 먼저 튀어나와
상대의 마음을 헐어놓는 게 더 빠른 아이였으니까.

밤 9시. 하린에게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보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나 또 말 헛나왔다.]

몇 분 동안 답장은 없었다.

그러다, 휴대폰 화면이 천천히 환해졌다.

[준호야]

손끝이 조금씩 떨렸다.

[우리, 쉬자]

그 말은…헤어지자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근데 그 말이 더 무서웠다.
‘생각의 시간’이라는 것은
보통 관계가 다시 이어지기보다
조금씩 멀어지는 쪽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러다 결국,감정이 먼저 쏟아졌다.

“하린아, 제발…”
“나 진짜 고쳐볼게…”
“이번엔 다를 거야…”

메시지를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썼다가 지웠다.

그리고 결국 단 하나만 보냈다.

[한 번만… 만나서 말하게 해줘.]

점이 찍히는 순간,저녁 공기가 싸늘해졌다.

하린은 놀이터 옆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핸드폰 불빛이 얼굴 아래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뛰다시피 그곳으로 갔다.

“하린아…”

내가 부르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흔들렸다.슬픔과 지침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나는 숨도 못 고르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하지 마.”

하린이 놀라서 손을 뻗었지만 나는 이미 그 앞에 그대로 내려앉아 있었다.

“제발…나 진짜 고칠게.”

“준호야.”

“두 번 다시 그런 말 안 할게.헤어지자는 말도, 아무 말도 안 할게.
그냥… 네가 떠날까봐…그게 너무 무서워서…”

말이 나오면 나올수록
목이 더 조여왔다.
어린 애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하린은 나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도망치지도 않았고,나를 안아주지도 않았다.

그저 현실을 바라보는 어른 같은 눈으로,천천히 말했다.

“준호야.나 너 좋아해.”

그 말에 가슴이 잠깐 뛰었다.

“근데…”

그 뒤에 오는 말이 이미 가슴을 내려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너 힘든 거 알아.너도 상처 있다는 거 알아.”

하린은 숨을 한 번 삼켰다.

“근데…그 상처를 나한테 계속 던지면…나는 너 옆에 오래 있을 수가 없어.”

나는 말문이 막혔다.

“너 아직…관계를 감당할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그 말은
비난이 아니었다.
판단도 아니었다.그저 사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듯한 말이었다.

“그래서…우리 여기까지 하자.”

나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나 진짜—”

“준호야.”

하린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둘 사이의 공기가 멈췄다.

“나 너 좋아하지만,
지금은 너를 지켜줄 방법을 모르겠어.
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네 마음이 네 말보다 먼저 날 밀어내는데 내가 어떻게 버티니.”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숨이 턱 하고 끊어지는 느낌.

“미안해.”하린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정말 미안해.
나 너 상처 주려고 하는 말 아니야.
우리가 계속 이렇게 가면…
서로 더 망가질 것 같아서 그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지내.”

세 글자.세상의 무게를 다 담은 듯한 말.

그리고 그녀는 돌아서서 걸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

아무리 소리를 삼켜도 들리지 않을 마음.

그게 이별이었다.

나는 얼마나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찬 바람이 몇 번 스쳐갔고,
놀이터 그네가 바람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몇 번이나 들렸던 것 같은데,
그 모든 게 멍한 울림으로만 남았다.

몸을 일으키는 데 한참이 걸렸다.
다리는 남의 것처럼 휘청거렸고,
가슴은 진흙처럼 무거웠다.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아무것도 낫지 않은 채로.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머리맡 바닥에는
어젯밤 던져놓은 휴대폰이 그대로 있었다.
전원을 켜보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

그때 문이 ‘탁탁’ 두드려졌다.
아버지는
늘 그렇듯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노크 소리조차 자신이 내는 힘을 조절하지 못했다.

문이 조금 열리더니
아버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입 모양과 손짓으로 말했다.

“준호, 학교.”

그 말은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너무 잘 알아들었다.

아버지는 늘 그랬다.
입 모양, 어깨, 손의 움직임으로 말하곤 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불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가기 싫어.”

작게 말했지만
아버지는 들을 수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다가
아버지는 다시 크게 입 모양을 만들어 말했다.

“학교. 가야지.”

나는 이불 속에서
이빨을 꽉 깨물었다.
말을 듣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말을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
대답을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순간 너무 버거웠다.

“…그냥 좀 내버려 둬요.”

아버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내 표정은 보았다.
아버지의 눈썹이 잠시 흔들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손짓이 날아왔다.

“일어나. 학교.”
(손바닥을 위로 올려 끌어올리는 동작)

나는 참으려고 했다.정말로.
하지만 오늘의 나는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 좀…그만 좀 하라고!!”

내 목소리는
아버지의 귀에는 도착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표정에는 도착했다.

아버지는 순간 멈췄다.
내 입모양만 보고도
그 말의 형태가 무엇인지
너무 정확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눈이 서서히 내려갔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고 방을 나갔다.

문을 닫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침묵이 더 잔혹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린에게 하던 말투를…아버지한테도 그대로 내뱉어버렸네…”

또 하나의 관계가 내 입에서 무너졌다.

오후가 되자 방 안을 더 견딜 수가 없었다.

학교에 갈 수는 없었고,
집에 있자니
아버지와 마주칠 자신도 없었다.

나는 후드 모자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섰다.

걷고 또 걸었다.
목적지도 없이.
그냥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를 멀리 버리고 싶었다.

그때 골목 어귀에서
몇 명의 형들이 담배를 피우며 떠들고 있었다.

나는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말했다.

“야, 학생. 왜 그렇게 처박힌 표정이냐?”

나는 듣지 못한 척 발걸음을 빨리했다.

하지만 또 다른 목소리가 날아왔다.

“야, 너. 뭐 기분 나쁘게 쳐다보고 가냐?”

그 말이 그 순간 내 안에 쌓여 있던 모든 걸 부숴버렸다.

나는 돌아섰다.

“…쳐다봤으면 어때서요.”

형들의 입꼬리가 사라졌다.

“뭐래는 거야 이 새끼가.”

“기분 나쁘네?”

“요즘 학생들 싸가지 없지.”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나는 머릿속에서는 소리치고 있었지만
몸은 아무 힘이 없었다.

‘그만해, 준호야. 지금은 아니야.도망가.’

하지만 오늘의 나는 도망칠 수 없는 날이었다.

“형들이 먼저 시비 걸었잖아요.”

그 말 끝에 형 하나의 손등이
내 턱을 강하게 후려쳤다.

세상이 한 번 기울었다.

또 한 대. 또 한 대.

나는 벽에 부딪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평소 같으면
몸이 먼저 반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모든 감정이 몸을 가라앉힌 날이었다.

나는 그냥 맞았다. 힘도, 의지도, 이유도 없이.

형들은 나를 몇 대 더 차더니
욕을 토해내고 돌아섰다.

나는 신발 한 짝이 벗겨진 채 비틀거리며 걸었다.

하린의 마지막 말.
아버지의 침묵. 형들의 웃음.

모든 게 뒤섞여 머리 속에서 울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발목이 꺾여 나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차가운 바닥,
습한 냄새, 흙먼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냥 그대로 누워 있었다.

살고 싶은 마음도,
일어나고 싶은 의지도 그 순간은 없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앞에는
좁고 어두운 골목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익숙한 골목.

처음 상인을 만났던 그 이상한 골목.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어 보였다. 마치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그 골목으로 향했다.

다친 다리.
멍든 턱. 가라앉은 마음.

모든 것이 나를 뒤로 끌어당겼지만 돌아갈 생각은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곳만이
지금의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 같았다.

골목 어귀에 도착했을 때,
천막 아래 흔들리는 작은 등불이 보였다.

그 등불은 바람에 일렁이며
조용히 말하는 것 같았다.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