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골목 상인
다음 날 학교.
운동장 끝으로 걸어가는데 딱 그 친구가 보였다.
나랑 늘 붙어 다니던 애.이름은 민수.
그런데 오늘은 나를 보자마자
피하는 눈빛이었다.
민수는 다른 애들과 서있다가,
내가 다가가자 표정이 굳었다.
“…어제 그 얘기… 진짜로 한 거야?”
민수가 먼저 말했다.
나는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내가?
내가 너 욕했다고 누가 그래?”
민수의 턱이 굳었다.
“들었어.
니가 체육창고 앞에서 애들한테 그랬다며.
내가 요즘 잘난 척한다고.”
나는 얼어붙은 듯 말했다.
“그건…
진짜 아니야.” 민수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곧바로 굳어졌다.
“…그래도 들은 사람이 있다는데
내가 어떻게 믿냐.”
그 말이 가슴 한가운데를 쿡 박았다.
나를 믿지 못한다고?
그게 더 아팠다.
나는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민수야.
네가 나를 믿어줬다면
이렇게 말 안 했어.”
민수는 잠시 눈을 피했다.
“…나도…
혼란스러웠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종이 울렸다.
애들은 흩어졌고
민수도 돌아섰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말 한마디로
진짜 이렇게 되는 건가.’
나는 그날 오후
다시 골목으로 향했다.
천막 문을 열자
아저씨는 주전자를 닦고 있었다.
“왔냐, 준호야.”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또 어딘가 깊숙이 스며들었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형…
말 한마디가
사람을 이렇게 바꾸네요.”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내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말했다.
“형.
민수도 나한테 화난 게 아니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사이에서 흔들린 것 같아요.”
아저씨는 컵에 물을 따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바로
말 한마디의 잔인함이지.”
“…잔인함?”
아저씨는 지팡이를 바닥에 톡— 하고 갖다 댔다.
“준호야.
말은 칼이 아니다.
근데—
해석은 칼이 된다.”
나는 멍해졌다.
“무슨 뜻이에요?”
“말은 그냥 소리다.
그 자체로는 상처가 될 수 없다.
근데 사람이
자기 마음의 두려움과 기대를 실어서 들으면…
같은 말도 칼이 되지.”
그 말이
머리와 가슴 사이를
이상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반박했다.
“근데요 형,
저는 진짜 욕한 적 없어요.
제가 안 했는데
왜 걔가 그렇게 들었을까요?”
아저씨는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네가 안 했다는 사실은
문제가 아니다.”
“…뭐라고요?”
“문제는—
걔가 ‘그럴 수도 있다’고
잠깐이나마 생각할 정도로
너희 둘 사이에
쌓여 있던 미세한 거리감이다.”
나는 당황했다.
“형.
저희 사이에 거리감 없었어요.”
아저씨는 웃음을 참듯 말했다.
“그럼 왜
그 말을 듣자마자
네가 그렇게 크게 다쳤겠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이 막혀버렸다. 아저씨는 말했다.
“준호야.
친구 사이에 말 한마디가 오해를 만드는 건
그 말이 강해서가 아니고— 이미 서로에게
작은 금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 말이
어딘가에서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형.
그 금은 어떻게 메꿔요?”
아저씨는 주전자를 내려놓고
지팡이를 세워 내 쪽으로 기울였다.
“금은
사과로 메워지는 게 아니다.”
“…그럼 뭐로요?”
“진심을 보여주는 행동으로 메워진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말이 아니라요?”
“그래.
말은 금을 만든 놈이고, 행동은 금을 메우는 놈이다.”
그 말은 나도 모르게
가슴 한가운데로 들어와 박혔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형.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돼요?”
아저씨는 조용히 말했다.
“준호야.
민수에게 가서 ‘믿어달라’고 하지 마라.
대신—
‘나는 너를 믿고 있다’고 행동으로 보여줘라.”
그 말은
느리고,
무겁고,
이상하게 따뜻했다.
아저씨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기억해라, 준호야.”
그는 지팡이를 손바닥에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친구를 지키는 건
말의 힘이 아니라—
‘상대가 나를 오해해도
나는 그를 버리지 않는다’는
그 끈질긴 마음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반쯤 이해했고,
절반쯤은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마음이
살짝 풀리는 느낌이 있었다.
오늘 밤,
나는 민수에게
억울함을 털어놓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를 먼저 찾아갈 생각이었다.
말이 아니라
한 걸음으로
나는 골목에서 나오는 순간
민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내일 가서 뭐라고 하지?
무조건 사과할까?
아니면 그냥 옆에 가서 앉을까…
생각은 여러 갈래로 뻗었지만
이상하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민수를 버리면
내가 더 안 좋아질 것 같다.’
그 생각이
천천히 마음속에서 모양을 잡았다.
길 끝에 다다랐을 때
노을이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고
나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조금 늦췄다.
집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들어갔다.
거실은 조용했다.
아빠는 소파에 앉아
손전등을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자기만의 취미를 하고 있었다.
아빠는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내 발소리를 느낀 건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아빠와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어제 같으면
나는 그 눈빛에서
‘오해’만 먼저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조금 다르게 보였다.
민수도, 나한테 이런 마음이었나.
나는 그 생각에
아빠를 조금 더 오래 바라보았다.
아빠가 손짓으로 물었다.
“늦었네. 어디 갔다 왔냐?”
나는 수화로 대답했다.
“그냥… 잠깐 바람 좀 쐬고 왔어요.”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으면
이 대화도 괜히 따갑고
오해가 섞였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 작은 고개 끄덕임이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빠는 갑자기 손짓을 멈추더니
수화로 물었다.
“밥 먹었냐?”
나는 순간 멈췄다.
아빠가 먼저 나에게
뭔가를 물어본 건
오랜만이었다.
“…아직요.”
아빠는 천천히 손짓했다.
“라면 끓여줄까?”
나는 놀랐다.
그라곤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뇨. 제가 끓여먹을게요.”
아빠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내 마음속 어디선가
아주 작은 매듭이
살짝 풀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
아빠를 잠깐 더 바라봤다.
아빠는 손전등을 만지작거리며
무심한 듯 앉아 있었지만,
그 모습이
어쩐지
민수의 흔들린 얼굴과 겹쳐보였다.
아빠와 나 사이에도
말로 설명되지 않은 ‘서운함’들이
쌓여 있었겠지.
문득,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말은 칼이 아니다.
해석이 칼이 된다.”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작게 속삭였다.
“…나도
아빠를 너무 빨리 해석했던 걸지도.”
그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밤,
세상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지만
나 안의 어떤 조그만 조각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수에게 가는 한 걸음,
그걸 향한 마음이
아빠에게도
아주 작게 스며들었다.
나는 스스로도 모르게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느꼈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사람에게 가까워진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