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야, 그 배추 거기에 넣지마
그건 속 잘 안 먹은 거야.
옆으로 빼.그리고 너는, 그냥 그릇이나 씻어.
괜히 김장판에서 폼 잡지 말고."
엄마가 김치 속을 양푼에서 퍼내며 말했다.
배춧잎은 반쯤 열려 있었고,
고춧가루와 젓갈은 엄마 손끝에서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보다 정확하고 빠르게,그리고 누구보다 통쾌하고 자신 있게.
“엄마, 이거 너무 짠 거 같은데…”
"짠 걸 네가 알아네가 짜게 자라서 여기까지 온 거야.
안 짰으면 벌써 인생에 절여졌지.
짜게 키운 건 다 이유 있어, 알겠냐?"자식들은 다 웃었다.
엄마는 욕을 할 땐 웃지 않았다.
대신 정확하게, 단 한 번에 이긴다 막내가 씩씩대며 한 마디 보탰다.“
요즘 애들은 저염식 좋아한단 말이야.”
“너는 저염이 문제가 아니라,
생각이 너무 묽어.멋대로 굴고,
말 끝마다 건방져.
그게 문제야.생각이 짜야 말을 짜지.”
둘째인 내가 슬며시 웃자,
엄마는 슬쩍 나를 봤다.
다 말은 하지 않아도,
그 눈빛엔 늘 뭔가 더 있다.
그녀는 자식들에게 말은 저렇게 하지만,항상 깊은 사랑을 담고 있는 그녀였다.
늘 모르겠지만,
"엄마 젊을 땐 뭐 하고 살았어?"
셋째가 툭 던졌다.
엄마는 고무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싸우고 다녔지.노래하고, 도망치고,때리고 울고, 때리고 웃고
.그러면서도 한 번도 졌다는 생각은 안 했어."
"왜?""난 사람한테는 안 져.운명한테도 안 져.
내가 틀리면 인정해.
그게 지는 건 아니야.
지는 건 억지 부리는 거야.
난 그런 거 안 해.
"엄마는 다시 김치통을 꽉 닫고 고개를 들었다.
겨울 하늘은 맑았고, 그 눈빛은 더 맑았다.
“그땐 진짜 날개가 있었어.”
한 마디였지만,
그 속엔 세월과 사랑과 전쟁과 웃음과 인생이 다 담겨 있었다.
"근데 지금은?"
"지금?지금은 발로 기어 다니지.
근데 봐라.
아직도 이 손에 힘 있다.김장도하고, 인생도 담가.
니들 넷 성격 다 제각각인데,
내가 이걸 다 데리고 여기까지 왔으면…
그건 날개보다 대단한 거다,
안 그래?"
엄마는 말끝에 웃었다.
그 웃음은, 자기를 다 알고 있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엄마를편견이 없는 눈으로한 사람으로서 여자로서 바라보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우리 엄마.내가 아는 가장 단단하고 통찰력 있는 사람.
그리고 내 인생이 시작된, 진짜 여왕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