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시골의 99칸 기와집은 동네에서도 으뜸가는 부자 집이었다.
영란의 집은 충청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마당 한복판에는 작은 분수가 물을 토해냈고,
대청마루는 언제나 햇살로 반짝거렸다.
그 집의 막내딸,
영란은 통통한 볼과 커다란 눈망울로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 집은 어마 어마한 부자였고
말을 타고 집을 달리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녀의 아버지 부인은 5명이 있었다.
그렇게 자식들도 많고 집안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영란은 막내 부인의 딸이었다.
봄, 목련과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마당엔 제비가 날아들었다.
어린 영란은 제비가 짓는 둥지를 가리키며 “삐삐집!” 하고 웃었고,
종종 닭을 쫓아다니다 넘어져 울기도 했다.
여름, 기와 위로 매미소리가 들끓고, 더운 날엔 댓돌에 대야 물을 받아 발을 담갔다.
수박을 먹으며 이마에 참기름을 바르고 있던 큰 오빠는 영란의 얼굴에 씨를 툭 던지며 장난쳤다.
저녁이 되면 부엌에서는 수육 삶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가을, 감나무가 붉게 물들고, 기와지붕 위로 낙엽이 구르던 날들. 영란은 감을 따서 입 안 가득 넣고, 감꼭지로 목걸이를 만들었다.
오빠는 그녀가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며 말했다.
“우리 영란이, 공주네 공주.”
겨울, 눈이 수북이 쌓인 날엔 사랑채 아궁이에 장작불이 타올랐고,
영란은 솜저고리를 입고 아궁이 옆에 엉덩이를 지졌다.
머슴 석돌이는 썰매를 만들어 주었고, 영란은 마당을 돌며 “달려라~ 말!” 하며 웃었다.
이 모든 기억은 영란이 커가며 점점 희미해졌지만,
그녀 마음 깊은 곳에 '처음으로 사랑받던 계절들'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봄이 지나 또 봄이 올 무렵, 그녀의 삶은 눈에 보이지 않게 기울기 시작했다.
네 살의 영란은 아직 몰랐다. 이 집의 기억이, 앞으로의 삶에서 가장 따뜻한 등불이 되리라는 것을.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오토바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그 큰 집은 불이 나버렸다.
불이 났어도 여전히 제일가는 부잣집인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남은 부인들끼리 패권의 싸움에서 친엄마는 밀려나게 되고,
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게
친엄마는 "금방 데리러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큰언니만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날 이후 친엄마의 소식은 영영 끊겼고, 영란은 셋째 부인을 진짜 엄마로 알고 자랐다.
셋째 부인은 말수가 적었지만 속정이 깊었다.
영란에게 말없이 밥을 차려주고, 머리를 빗겨주며 묵묵히 챙겼다.
그런 엄마가 진짜 엄마라고 믿기에 충분한 따스함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가면 세상은 달랐다. 부잣집 딸이란 이유로 영란은 눈총을 받았다.
남들보다 먼저 껌을 씹고, 스팸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 그녀를 친구들은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 번은 친구가 영란이 준 껌을 씹다 선생님께 혼났는데,
친구들은 일제히 "영란이가 줬어요!"라고 소리치며 등을 돌렸다.
영란은 왜 친구들이 자신을 미워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혼자 도시락을 먹으며 눈물을 훔쳤던 날이 많았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오빠가 웃으며 달려왔고,
엄마는 늘 조용한 웃음과 함께 따뜻한 밥을 내주었다.
영란은 그렇게 순진무구한 아이로 자라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사랑도 상처도 모른 채로.
그렇게 그녀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종종 오빠와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그날도 밥상 위엔 라면 두 그릇이 놓여 있었다.
작은오빠 강철이 끓인 라면은 유독 맛있었고, 진한 국물에 파 송송, 계란까지 휘저어 넣은 그것은
영란이에게는 인생 최고의 별미였다.
"한 젓가락만 더 줘, 오빠."
"네 것도 있잖아."
"그래도 그게 더 맛있어 보여."
말이 한 젓가락이었지, 영란이는 결국 오빠 그릇에 젓가락을 쑤셔 넣었다.
강철은 눈썹을 찌푸리며 젓가락을 쳐냈다.
"야! 그만 좀 해!"
"진짜 쪼잔하게 굴긴… 라면 하나 더 끓이면 되잖아!"
"내가 끓였으니까 내 마음이지!"
순간 감정이 폭발했다.
영란은 발치에 있던 실타래를 잡아 들었다.
마침 어머니가 수놓던 그것이었다. 실 한가득 뭉쳐 있는 그것이 어쩐지 폭탄 같았다.
"이거나 먹어, 이 짠돌이 오빠야!!"
휙!
실타래는 마치 무게를 가진 감정처럼 날아가 강철의 눈에 정확히 명중했다.
"악!! 눈!!!"
순간 그의 눈 주변이 붓기 시작했고, 영란은 놀란 마음도 잠시, 본능적으로 뛰었다.
"야! 영란아!!! 죽었어!!!"
"너 일로 안 와? 그냥 잡히는 게 좋을 거야.!"
"안 잡히면 안 맞는 거지!! 으악!!"
영란은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밤이었다.
골목은 조용했지만,
영란의 가슴은 쿵쾅거렸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숨을 죽이고 담장 뒤에 웅크려 있던 그녀는 그 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떨고 있었다.
문득 골목 너머에서 들려오는 작은오빠의 목소리.
"영란아… 나와. 나 진짜 미안해…
아프긴 한데, 네가 더 무서울 거 같아서… 나오면 안 때릴게. 약속할게."
그 목소리는 처음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영란은 어릴 적 강철이 다쳐서 우는 자신을 안아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오빠가 맞았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진짜… 안 때릴 거야?"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영란을 본 오빠는 웃지도 못하고, 화도 내지 못했다.
밤탱이가 된 눈을 비비며, 조심스레 말했다.
"이게 실타래 던질 일은 아니잖냐… 아, 근데 아프긴 진짜 아팠다, 야."
"미안해. 나도… 안 던지려 했는데 그게…"
강철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다음부턴 던질 땐 쿠션으로 던져라. 실은… 진짜 위험하더라."
두 사람은 그날 밤, 라면 한 그릇 대신 생긴 추억 하나를 나누며, 조용히 집으로 걸어갔다.
그날의 사건은 가족 모두가 회상할 때마다 웃음과 함께 따라붙는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영란은 깨달았다.
진짜 무서운 건 눈퉁이가 아니라, 사랑이 식는 거라는 걸.
그리고 이렇게 순수했던 삶은 고등학교 1학년 첫날 아침,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날 그녀는 치마 밑에 바지를 껴입고 학교에 나섰다.
평범한 하루 같았지만, 그것이 바로 그녀가 '전설의 7 공주'로
거듭나는 첫날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