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나로 살던 시절
최영란.
최영란은 고등학교 교문을 넘어서면서 더 이상 순한 기와집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은 당당했고, 눈빛에는 이전에 볼 수 없던 강렬함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둘러싼 분위기가 변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입학과 동시에 영란은 학교에서 여성 일진 그룹, '7 공주'의 일원이 되었다.
빠르게 그녀는 '부짱'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학교 내 싸움부터 타 지역 원정 싸움까지, 그녀는 항상 중심에 있었다.
영란은 부짱 이었지만, 항상 먼저 나섰고 누가 자신의 친구를 건들 기라도 하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응징을 해주곤 했다.
그리고 실질 적인 짱인 재희는 집안의 형편이 어려웠고
사고를 치고 싶어도 항상 집안의 사정을 생각해서 많이 나서는 편은 아니었다.
어느 날, 영란은 친구들과 타 지역으로 원정을 나갔다. 다른 지역의 일진 무리와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상대 무리의
우두머리가 담배를 피우며 영란을 노려봤다.
"너, 여기 왜 왔어?"
"구경 왔지. 그쪽 얼굴 구경하러."
그 옆에서 영란의 친구 민희 가 대답했다.
"야 너네들 이제 다 죽었어!!
영란이 모르지 오늘 알게 될 거다."
"지랄하네."
상대가 피던 담배를 영란 쪽으로 던졌다. 영란은
던져진 담배를 가볍게 밟아 끄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재희가 나서려 할 때, 영란이 막아섰다
"내가 처리할게 여기 있어."
그때 상대편에서 어이가 없는 듯이 말했다.
"아니 우리가 너네들 장난감이냐 누가 맡고 말고 하게?"
"하고 싶은 사람이 한다는데 그것도 잘못이냐.?"
영란의 친구들은 떠들썩하게 웃기 시작했고
반대편 친구들은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이게 진짜 미쳤나. 저년 잡아."
상대의 명령에 상대편 여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영란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나가
상대 무리 중 한 명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너희가 감히 나한테? 나 최영란이야! 기억 잘해!"
상대 무리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 영란은 강하게 상대를 밀어 넘어뜨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주먹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본 상대편 우두머리는 잠시 망설이다 조용히 뒷걸음쳤다.
"너희 대장 어디 갔어? 그렇게 자신 있더니 왜 벌써 꼬리를 말아?"
상대 무리는 기세가 꺾였고, 영란이와 친구들은 승리감에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영란의 친구 민희는 상대무리들의 기강을 잡기 시작했다.
"야 다시는 까불지 않겠습니다 10번 재창한다 실시!!"
그날 밤, 7 공주 멤버들은 한적한 빈 창고에 모였다.
영란은 직접 작은 바늘을 준비하고 검은 먹물에 피를 섞었다.
멤버들은 모두 오른쪽 팔 어깨 위에 흑장미 문신을 새기기로 했다.
"야, 아프지 않겠어?" 친구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 정도는 아픔도 아냐. 우리 영원히 함께하자는 증거야."
영란은 자신감 있게 말하고는 멤버들의 팔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문신을 새겼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아 혼자 자신의 오른쪽 팔 어깨 위에 흑장미를 새겼다.
아픔은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 흑장미파야.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린 끝까지 함께야. 알겠지?"
모두가 영란은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퍼져나가며 최영란이라는 이름을 더욱 빛나게 했다.
영란의 일상은 싸움과 갈등 속에서도 웃음과 우정이 가득했다.
7 공주의 친구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그 시절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생기 있고 자유로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수업을 빼먹은 어느 늦은 오후,
영란은 교복 위에 검정 카디건을 걸치고 친구 둘과 함께 시내 구석에 있는 허름한 다방으로 향했다.
“야, 거기 새로 생긴 데 알지? 언니들이 장난 아니라던데.”
입구에 들어서자 담배 연기와 함께 묘하게 눅진한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카운터엔 붉은 립스틱에 곱게 빗어 넘긴 머리, 눈꼬리를 추켜올린 중년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딱히 놀라는 기색도 없이,
영란과 친구들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애들이 무슨 다방이야? 학교 끝났음 집에나 가.”
영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천천히 씹던 껌을 혀로 밀며 말했다.
“우리 돈 내고 커피 마실 건데요. 손님 차림 안 해요?”
그 말에 다방 여자의 표정이 뒤틀렸다.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이 교복 입은 것들이—”
탁.
영란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쳤다.
그 소리에 다방 안에 있던 남자 손님들도 고개를 돌렸다.
“언니, 내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건가?
커피집이면 커피나 팔지, 훈계는 학교에서 다 듣고 왔거든.”
그때였다.
다방 여자가 슬리퍼를 끌며 다가오더니,
영란의 앞머리를 손으로 툭 치며 말했다.
“넌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기생 같아. 싹수가 없어.”
찰나의 순간.
영란의 손이 먼저 올라갔다.
다방 여자의 뺨을 정확히 한 번 후려쳤다.
그때 민희가 나서며 말했다.
“기생이라뇨? 언니가 기생 아니에요?
이 동네 ‘최영란’이라고. 들어는 봤나요?”
싸늘해진 다방 안.
다방 여자는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지 몰라서 그래.”
영란이 비웃으며 말했다.
“알고 싶지도 않고
근데 언니는 오늘, 다방에서 고등학생한테 뺨 맞은 여자로 남을 거야.”
영란은 친구들과 함께 커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다방을 나왔다.
바깥공기는 차가웠지만, 그녀의 속은 묘하게 후련했다.
친구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야… 진짜 너 미쳤다. 그 언니 동네 조폭이랑 친한 거 알지?”
그 순간 빰을 맞은 다방언니가 나와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야 꼬맹이 너 나 따라와."
그 말에 영란은 웃으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그 다방의 옥상이었다.
옥상에서 그 여자는 갑자기 소주병을 바닥에 던져 전부 깨더니 웃으면서 하는 말이
정말인지 어이가 없었다.
"너, 여기 구를 수 있냐?"
"여기 구르면 내가 봐줄게."
그 소리에 영란은 어이가 없는 눈빛으로 영란은 말을 했다.
"거길 내가 왜 굴러야 되는데."
말이 끝나기 도 전에 그 다방여자는 윗옷을 벗고 구르기 시작했다.
온몸에 깨진 병조각이 몸에 박혔고, 피는 송글 송글 맺혀있었다.
"너 이 정도 깡 없으면 까불지 마 앞으로."
영란은 어이가 없다는 웃음으로,
발로 그녀의 배를 찼다.
"나는 정상이랑만 상대하지 너 같은 비정상은 상대 안 한다. "
"야,,야,,병원이나 가라."
그 다방여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나 머리채를 잡으려는데.
영란은 뒤돌려 차기로 그녀의 턱을 가격했다.
그렇게 그녀는 기절을 했고, 그 후로부터
그 다방은 며칠간 문을 닫았고,
‘교복 입은 계집애가 다방 언니를 혼내줬다’는 소문은
어느새 7 공주 전설의 한 장면으로 새겨졌다.
그리고 충청도 시골의 어느 여고.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2교시 국어 시간, 교복 소매에 땀이 밴 여학생들은 선생님의 시 읊는 소리에 졸음과 싸우고 있었다.
“이육사의 청포도…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영란은 3학년 2반 창가 맨 끝자리에 앉아, 연필 끝을 똑똑 끊으며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눈은 졸린데, 귀는 어수선했다. 운동장 쪽에서 뭔가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때, 뒤에서 재희가 바닥을 톡톡 치며 말했다.
“야, 영란아… 너 오빠 아니냐?”
영란은 고개를 홱 돌렸다.
“뭔 소리야?”
그 순간, 창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으아아악——!!!”
“야야야 윗도리 벗었어!!!”
“진짜로 왔어, 진짜로!!!”
"야. 저오빠 빠구 없다."
학생들이 창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국어 선생님이 당황해 분필을 떨어뜨릴 정도였다.
그 틈을 타 영란도 조심스레 창밖을 봤다.
운동장.
강철. 그녀의 작은오빠였다.
고무신을 질질 끌며 웃통을 벗은 채, 남자 일곱 명과 함께 운동장 한복판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반바지 위로 살짝 접은 티셔츠 자락, 입가엔 시건방진 웃음.
거기에 팔뚝 힘줄이 뻗치고 땀에 젖은 머리칼이 햇빛을 반사했다.
그는 갑자기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영란아!!! 오빠 왔다~~~”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책상에서 일어난 여학생들, 교탁 위로 뛰어오르는 아이들.
“편지 써! 써! 써!!”
“나 볼펜!!! 접을 종이!!”
종이비행기가 만들어졌고, 종이 뒷면에는 전화번호를 적거나, 이름을 묻는 짧은 문장들이 쓰였다.
전교생이 마치 콘서트에 온 듯 열광했다.
영란은 이마를 짚었다.
“…저 싸가지 없는 놈 싸가지 없게 여길 왜와!…”
혼잣말을 하고는 일어나 외쳤다.
“야! 다 닥치고 앉아!!! 뭐가 멋있냐!!! 걔 그냥 우리 집 바보야, 바보!!!”
하지만 반은 이미 통제불능.
어떤 애는 너무 웃겨 울고 있었고, 어떤 애는 “저 사람 나랑 사귀면 죽어도 여한 없다”고 했다.
심지어 겁 없는 1학년 하나는 반창문에서 종이비행기를 던지며 외쳤다.
"야야야 저 오빠 영란이 언니 오빠래."
“영란이 오빠! 저 3반 송미자예요!!! 이름만 기억해 줘요!!!”
한편, 강철은 공을 차다가 친구에게 말했다.
“야, 내가 이 학교 운동장에 발자국만 남겨도 전설이 된다잉?”
“그려. 근데 강철아 너 오늘 영란이 한테 맞다 죽는 거 아니야?.”
웃통을 터는 강철의 모습에 한 여학생은 실신했다.
영란은 교탁에 기대며 말했다.
“… 드디어 돌았구나. 근데 진짜 아무리
볼수록 미친놈이고.”
"진짜 싸가지없네..."
결국, 사건은 학교장에게 보고됐다.
강철은 정학이 아니라 퇴학을 당했다.
학교 출입 금지. 여고 주변 백 미터 접근 금지.
하지만 그날의 일은 전설로 남았다.
그 후에도 수년간, '영란이 오빠 사건'은 점심시간 반찬거리였고,
졸업 앨범에는 종종 종이비행기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강철은 집을 나섰다.
해뜨기 전의 충청도 골목길, 흙먼지가 발에 묻을 틈도 없이 걷고 걷고.
등에는 헌 가방 하나, 손에는 엄마가 싸준 김치 보자기.
영란은 담요를 들고 마당에 나와 조용히 쳐다봤다.
“야.”
강철이 돌아봤다.
그 짧은 한 음절에, 온갖 감정이 묻어 있었다.
“… 너, 진짜 가냐?”
“가야지. 여기서 뭐 해. 전설은 짧게 끝나야 멋있는 거거든.”
"아진짜 싸가지없게 어딜가."
강철은 웃으며 가방 끈을 조였다.
그러다 영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돈 벌어서, 너 창피 안 당하게 해 줄게.
"지랄하네 이미 다 해놓고 뭘 이제 와서 안 당하게 해 준다는 거야 …
"그냥 집에나 있어 어디 가서 사고 치지 말고."
"하하 나는 너한테 꼭 도움 되는 놈이 될 거야.”
그 말에 영란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곤 살짝 눈을 떴다.
“… 미친놈.”
강철은 웃었다.
“그래, 나 미친놈이야.
근데 그 미친놈이 지금부터, 서울 올라간다.”
기차역.
서울행 완행열차가 어둠을 가르며 들어왔다.
기적 소리보다 더 크고 멋진 건, 강철의 눈빛이었다.
문 열리기 전, 그는 주머니에서 꼬깃한 사진 한 장을 꺼내 봤다.
영란이, 중학교 입학식 날 찍은 사진.
그날도 그녀는 똥폼 잡고 찍은 얼굴.
“영란아, 오빠가 돈 많이 벌어서…
너 학교도, 미래도, 니 인생도
오빠가 지켜줄게.”
강철은 그렇게 말하고,
문이 열리자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
가구공장.
기름때 묻은 손.
철야작업.
밀린 월급.
그리고, 다문 입술.
오빠는 미친놈이지만,
영란을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는 그런 멋있놈이었다.
그렇게 나의 전설 같은 7 공주도 마무리가 되었다.
그렇게 그녀의 졸업이 다가왔다.
교문 앞, 졸업사진을 찍는 아이들 틈에서
영란은 멍하니 서 있었다.
교복 저고리 위로 달린 리본이
아직 바람에 펄럭이는데, 마음은 벌써 끝나 있었다.
“야— 영란이! 마지막이다, 찍자!”
친구 선미가 손을 흔든다.
영란은 억지로 웃어 보인다.
찰칵.
그 순간, 사진 속 웃음은
평생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자유였다.
아이들이 흩어지고, 운동장이 비어갈 무렵
영란은 텅 빈 교실로 올라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햇빛이
마치 마지막 인사라도 하듯 교실 바닥을 핥고 있었다.
칠판 한편엔
“○○여고 3-2, 졸업을 축하합니다”
분필로 쓰인 글자가 반쯤 지워져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축하합니다’ 옆에
누군가 작게 써놓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근데 어디로 가야 하죠?”
영란은 괜히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어디로 가야 하지.”
집에 돌아오니 작은오빠 강철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업복에선 톱밥 냄새가 났다.
“졸업, 축하한다.”
“응.”
“…그, 너 어릴 때는 말이야,
세상이 좀 다를 줄 알았어.
근데 살아보니까… 사람은 자기가 발 디딘 데가 세상이더라.”
“나도 이제 알아야겠지.
내가 디딜 데가 어딘지.”
강철은 조용히 지갑을 꺼냈다.
그 안엔 몇 장 안 되는 지폐가 있었다.
“이거. 서울 올라가면 써.
일 배워보든가, 옷 해보든가,
그건 네가 정하고.”
영란은 그걸 한참 바라보다가
“이렇게 작게 접은 돈, 참 무겁네…”
하고 말하곤 조용히 웃었다.
밤이 되자, 마당에서 개 짖는 소리도 멎었다.
영란은 창가에 기대앉아 마지막으로 교복을 접었다.
그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서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허전함이 고개를 들었다.
"아... 끝났구나."
울고 싶지도 않고, 웃고 싶지도 않고,
그냥 뭔가가 흘러가 버리는 기분.
그 시절, 친구들과 뛰어다니던 복도.
몰래 친구들과 학교를 도망 다 오던 시간
오빠가 운동장에 나타났을 때 미친놈이라 욕했던 일.
모든 것이
자유의 이름으로 아름다웠던 시절.
그 자유는 오늘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