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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Feb 11. 2017

영화는 어떻게 현실을 극복하는가 <재심>

두 편의 영화만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김태윤 감독은 돈과 권력이 지배한 법과 시장의 논리를 기어코 이겨내고야 마는 인간의 일대기를 그리는 전문가가 되려는 것 같다. 실화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재심>은 그의 필모그래피에 중요한 발자국을 남기는 영화이다. 실화가 영화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김태윤 감독은 일종의 자기 스타일에 방점을 찍어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는 그것을 벌써 두 번이나 해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언뜻 익숙하게 느껴지면서도 꽤나 특징적이다.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재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홀어머니와 살며 다방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년 현우(강하늘)는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우연하게도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경찰은 당시 사건을 매우 이기적이고 부패한 욕망으로 이용하기로 한다. 목격자에서 피의자가 된 현우는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가 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다.

누명을 쓴 현우는 15년 선고를 받고 5년 감형을 받아 10년 뒤 출소를 한다. 이 사건을 우연히 접하게 된 변호사 준영(정우)은 '돈 냄새'를 맡고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의 재심을 맡게 된다. 현우를 만나고 사건을 조사하면서 준영은 (너무나 영화적 이게도) 현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하여 검경 조직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게 된다. 재심이 열리는 날, 법정에 선 준영은 현실의 스냅사진으로 점프하여 무죄 선고를 이루어낸 박준영 변호사의 모습으로 바뀌고 영화는 끝이 난다.



줄거리를 살펴보아도 알겠지만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은 이미 영화를 '뛰어넘고 있다'. 그래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재심>은 실화를 뛰어넘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시작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실화를 전제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콘텍스트로서 필요한 서술에는 때때로 힘을 빼거나, 극적으로 필요한 장면은 극대화하여 드라마 타이즈의 모습으로 강화하는 것이다.


글자로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약촌오거리'라는 도로 이정표가 너무 자주 등장하고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프레임 안에 굳이 들어와 있는 장면은 아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식이다. 재심 소송을 위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준영이 맞이하는 각종의 위기들, 그리고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감화를 받는 단초들은 극적인 표현을 위한 대명사격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한 상징적인 장치들로부터 비롯된다. 돈이 가진 힘은 보이고 들리는 그대로의 지폐와 금액으로 표현되고, 사법 집단의 폭력은 과잉으로 나타난다. 


사건의 진상을 해부하는 회상 씬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앞 뒤 자르고 '진상은 이렇다'다고 등장인물들이 구체적으로 읊는 장면들만 도려내어 불안한 각도로 편집되어 즉각적으로 들어왔다가 즉각적으로 빠지는 방식. 이런 형식으로 반복되는 회상 장면은 뚝 떼어놓고 보면 촌스럽기 그지없지만 영화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본다면 전략적이다. 예상하다시피 <재심>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다큐멘터리적인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심>의 목적은 드라마 타이즈의 양적 반복이 환기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부패한 장면의 반복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부당함의 호소이다.



영화 속 '그것이 알고 싶다'에 등장한 변호사 준영의 모습과 인터뷰 자막은 김태윤 감독의 표현 방식을 압축적으로 극대화한 시퀀스라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소비되는 '그것이 알고 싶다'의 목적과 진의에서 떨어져서 다소 촌스럽고 유머러스하게 그려지는데, 이는 오히려 가장 절실한 모습으로 사회 정의를 외치는 사람으로 표현된다. 법과 사회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대중적인 공감이 필요할 때 요즈음 '그것이 알고 싶다' 만큼 효과적인 호소의 매개체는 없을 것이다. 스테레오 타입으로 극대화된 검경 조직의 행동과 얼굴들은 어떤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할지, 인물의 대사와 액션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들의 역할은 이미 악의적인 얼굴에 쓰여있을 정도이다.


사람들은 현실의 사건이 너무나 충격적이고 분노를 일으킬 때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관용어가 흘러넘치는 현실 속에서 실화를 다루는 영화가 그 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 배의 노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 실화 영화는 '극적인 탈'을 인물과 미장센에 뒤집어 씌우고 두배로 극적인 힘을 쏟는데 노력하기도 한다(이런 힘이 너무 과하게 실리면 극적인 인상만 남아서 실화를 다루는 영화가 극복해야만 하는 태생적인 과제를 극복하지 못한 채 끝나버리기도 한다). 


물론 이건 일종의 다큐멘터리가 되지 않기 위한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전략적 접근 방식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감안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이 영화가 되려고 할 때엔 (어쨌든) 상업적으로 관객들에게 '소비되기' 위하여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들 말이다. 그런데 김태윤 감독은 오히려 이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어필할 줄 아는 감독이다. 그러니까 그는 관객들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꼭 필요했던 형식적인 강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도드라지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식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재심>의 이러한 선택은 위에서 언급한 '드라마 타이즈'와도 같은 형태를 띠고 있어서, 실화 영화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소명인 리얼리즘에는 약간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러한 한계를 알면서도 벌써 이런 식으로 두 번째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감독의 뚝심이라고 봐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현실의 사건사고를 쾌감의 목적으로 재생산하여 소비하는데 익숙해진 TV 미디어의 흐름 속에서, 사회 정의를 이야기하는 실화 영화가 영화 관람료를 지불한 관객들에게 오락의 목적까지 실천하기 위한 최선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실화가 영화로 재탄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리얼리즘의 직접 묘사가 아니라, 현실(리얼)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TV 뉴스를 본 이후에 사후적으로 느끼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과도 같은 각성 효과를 영화를 보는 순간에 바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이다. 여기에 오락의 효과까지 제공하는 극적인 미장센과 인물의 표정이 있다면 실화가 영화가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은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약속>은 이러한 방식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촌스럽다고 느껴지기까지 한 영화였다. 그런데 김태윤 감독은 또 이러한 방식으로 두 번째 영화를 만들었다. 3년 전 <또 하나의 약속>의 표현 방식에 동의를 했던 사람이라면(특히 박철민의 '포스터 눈물'에 조금이라도 감독의 '의도적인 의도'를 이해 했다면) <재심>을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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