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으면 생존이 힘든 것,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건 바로 먹을 것-식량이다. 식량은 중요하다. 식량을 있어야 살 수 있다. 식량을 먹어야 힘을 낼 수 있고, 사랑을 할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다. 게다가 먹는다는 건 그 자체로도 큰 즐거움을 준다.
그렇고 그런 일상인으로 살면서, 특히 회사원으로 살면서 '감각'이 강렬해서 즐겁다고 느끼는 흔치 않은 순간들은 대부분 맛을 보는 순간들이다.
녹록지 않은 일상에서의 눈은 피로하고 손은 시리고 코는 이상한 냄새에 노출되어 있다. 그렇지만 입은? '맛있다'라고 연발하는 순간들은 정기적으로, 그리고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 먹는 일은 생존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쾌락을 수반해서 좋다. 게다가 내가 원할 때 비교적 편하고 쉽게 느낄 수 있어서 더 좋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간편함의 조건을 언제나 갖추기 위해서는 냉장고라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나의 감각이 언제나 신선하고 생기발랄하게 유지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나의 집에도 냉장고가 있다.
문을 열어 보면 냉동실엔 먹고 모아놓은 과일 껍질이 있고, 냉장실엔 건포도가 있다. 그 전에는 초콜릿이 몇 개 있었는데 이건 다 먹어서 이제 없다. 이것들 말고는 없다. 냉장고 안에 음식들을 채워놓지는 않았다. 먹고 즐거워지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지만 딱히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나의 집에서 가장 제 역할을 못하는 살림의 최고는 바로 이 냉장고일 것이다.
첫 번째 이유는 먹다 남기면 버려지는 신선한 것들이 아깝다. 이런 제약 조건이 없는 상온 보관의 식량들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행히도 많아서 그것들 위주로 사 먹기 시작했다.
두 번째 이유는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해 먹는 일에 대한 의지가 옅어졌기 때문이다.
혼자 집에서 무언가를 먹는 일, 그중에서도 해 먹는 일의 중요도를 많이 낮추었다. 이건 차려 먹는 일의 조건에 '다른 사람과 같이'라는 항목을 달기 시작하면서 시작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조건이 충족될 때에 그것에 힘을 싣기로 말이다. 이건 긴 설명을 하는 것보다는 '식구'라는 단어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조금은 추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다 보니 냉장고가 생각보다 딱히 쓸모가 없어졌다.
생활공간의 적지 않은 변화를 겪어오면서 살림을 늘렸다가 줄이고, 사들였다가 정리하고 하는 시간들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나와서 살고, 따로 살고, 그리워하며 사는 시간 동안 내 물건들의 반경이 넓어졌다. 혼자 살려면 이런 게 필요하지 하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들이 구체적으로 내 물건들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과도기를 지나서 없어도 되는 것들은 과감히 없애고 사는 생활을 하고 있다. 생각보다 아쉽지 않고 나쁘지 않다. 그런데 냉장고가 그 기준의 끄트머리까지 와버린 것 같은 허전함으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득 생각해보니 여간 슬프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냉장고에게 가장 추구하는 것은 '환대'를 위하여 언제나 준비 상태인 물건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건 남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환대와 보듬기를 위한 선물 상자로 바꿔 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