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by 해달

아침에 일어나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는 시간, 회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 밥을 먹은 후 아무렇지 않은 듯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시간, 양치질을 하고 손을 씻는 시간, 지하철을 타고 유리창 밖의 풍경을 보는 시간 안에는 항상 거울이 있다. 거울은 나의 눈 앞에도 존재하고, 가시적인 형상이 기억을 떠올려 비추는 바람에 내 마음의 안에도 존재한다.


거울을 보면 다른 이들과 피안의 세계가 보이고, 그 사이에 있는 나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나의 모습이 제일 중요하다. 풍경은 금세 시야에서 흐려지고 나는 나를 가장 뚫어지게 쳐다본다.


매일매일 거울을 보면서 하는 생각이 있다. 내일도 오늘과 똑같은 얼굴이면 좋겠어요. 지금 모습 그대로 내일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내 얼굴이 미적으로 만족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으로 해석될 정신적 쾌감 때문도 아니다. 젊음이라는 가치를 중시해서도 아니다.


지금 나의 모습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룬 것 없는 사람의 탈만 늙어버리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나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내가 생각하는 '이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공부와 성찰을 많이 해서 해박한 학자가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떠한 유혹과 좌절, 고난에도 스러지지 않는 강인한 정신의 현자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처음으로 접한 어른과도 같은 조건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건 나의 엄마 아빠를 보면서 느꼈던 그런 '역할'을 얻는 것이다.


어른이 될 필요도, 의무도, 누가 나에게 성장을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왠지 어른이 되는 일은 언젠가는 꼭 이루어야만 하는 숙제가 되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유추해볼 수 있는 내적 동기는 중학교 때 경험했던 일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동기가 나의 자아라든지 가치관을 형성한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런 자아 정체성 확립-fix에 대해서 완강히 거부하는 편에 가깝다. '어른'에 대한 고민은 현재도 진행 중이고, 이런 욕망의 집적이 도리어 나의 정체성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고 볼 수도 있겠다.


용량_줄인_거.png 언젠가 읽어 보겠다. "자아는 의식 ‘안에’ 있지 않다. 자아는 의식의 바깥에, ‘세계 안에’ 있다. 타인의 자아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세계의 한 존재이다."


세월은 흐를 수 있고 아름다움은 나의 몫이 아닐 수 있다. 단 하나의 두려움 때문에 거울 앞에 서 있는 오늘 나의 모습에 대한 고민을 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의 모습이 되는 것이 싫어서이다.


어쩌면 내가 화장을 하지 않고, 높은 구두를 신지 않는 이유는 어른이 될 수 없다는 자신감의 상실 때문에 스스로 거세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어서 노화가 오기는 왔지만, 무언가 덜 여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감독인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거울'을 보면 눈물이 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시간과 경험, 기억, 그리고 그리움과 욕망을 오롯이 품고 있는 나 자신을 쳐다보는 것. 그래서 거울을 보는 행위는 결국 나의 욕망을, 그러나 이루지 못함을, 그리고 그 욕망을 만든 애달픈 유년시절을 쳐다보는 일과도 같다.


아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장 폴 사르트르의 초기 저작 '자아의 초월성' 소개문을 본 것은 왠지 필연적이다.


나는 엄마에 대해서 반대의 길을 추구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든 말든, 난 엄마 얼굴을 많이 닮았다는 걸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되었다. 엄마 집에 가서 엄마 화장대 앞의 나를 볼 때 많이 느낀다.


* 주의 깊게 살펴본 내 주변의 사물들을 통해 성찰이 담긴, 깊은 글을 쓰고 싶었지만 역시나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쭈그려 앉아있는 옆으로 시선이 아예 꺾여버린다. 이것도 일종의 일기 같은 것이 되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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