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

by 해달

누구로부터 받은 비누를 쓰고 있다. 오가닉, 핸드메이드 따위의 단어가 장식으로 붙어서 세상에 나온 비누 같다. 그래서 하얗다거나 탐스럽지가 않고 어둡고 탁하며 질감도 거칠다. 어떤 재료를 썼는지는 모른다. 허브 같은 걸 썼나? 뭔지는 몰라도 좋기야 좋을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받게 되었고 결국은 나의 집에 정착한 이 비누를 꺼내어 쓰게 되면서 결심한 한 가지가 있다. 세수를 열심히 해서 맡은 바 비누의 기능을 다 하게 하여 소멸시키거나 물기 머금은 받침대에 짓눌러 물러 터져서 녹아 사라지게 되었을 때에는, 이걸 준 누군가에 관한 기억도 물러 터져서 녹아 사라질 것이라고. 이걸 다 쓰게 될 때에는 이런 물건이, 이런 기억이 있었는지도 없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손등에 스쳐 터져도 알 수 없는 연약한 비눗방울이 되길 바라며.



누군가로부터 받은 물건들에는 이런 어쩔 수 없는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나에게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묻어 있어서 물건을 주고받던 옛 기억들도 마음을 통해서는 보인다. 손에 쥐고 비비면 잊고 싶은 기억이 다시 생생하게 머릿속에 덧칠이 되기도 한다.


아마도 나의 생활이 여전했더라면, 슬프고 불쌍한 나에 대한 애착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더라면 잊힘과 사라짐에 대한 슬픈고도 기쁜 기대를-물건이 불러일으키는 연상작용들 속에서-여전히 안고 살았을 것이다. 비누처럼 녹아 없어졌으면 한다는 둥, 비눗방울과도 같이 공기 중에 흩날려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둥 잘 녹지도 않는 비누를 보면서 이 상황에 대한 문학적인 수사를 멈추지 않고 기억의 파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뭐 그런 거.



그런데 최근에 어떤 계기가 들어서면서 생각이라는 게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에 대한 생각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하게 되었다. 사람에 대한 어려움은 여전하지만 나를 이해하는 방법과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사람을 알고 그들과 어울리는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인파 속에서 빠져나온 다음, 사람과 헤어진 다음, 사후에 홀로 있을 때 찾아오는 비애와 외로움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다. 어울리는 그 순간 그 자체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건 무언가 좋은 경험과 추억으로 덧댈 수 있었던 여름 그리고 최근의 계기들 덕분이다.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의 생각과 마음에 큰 영향을 차지하는 '일과 사람'에 대하여 마음속에 새기는 인상과 생각의 변화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마음 놓고 쉬어도 좋은 시간들은 나를 쓰다듬고 돌아볼 여유를 주었다. 생활이란 게 시간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나를 풀어두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는 시간들을 비로소 '시작'하게 된 것 같다. 아예 모르고 지냈던 것은 아니었다. 이 회사를 다니게 되면서 까맣게 잊고 지냈던 것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 나를 위해 내가 해야 하는 것을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철학을 좋아하는 내가 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사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탐구이다.


사람이 슬픔이라는 나르시시즘의 시간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감정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는 슬픔의 무드가 항상 생활에 만연해야 한다. 이런 감정의 깊이가 조금이라도 얕거나, 조금이라도 유아적인 형태로 표현이 미끄러지면 '중2' 스럽게 된다. 가까스로 문학적인 품위가 지켜지면 그건 애수가 된다. 궁극적으로 내가 그렇게 지냈던 것은 후자를 목적으로 했지만 그동안의 나의 시간들은 사실 전자이지 않았나 싶다.


비누 이야기를 하다가 엉뚱하게 이야기가 샜다.

비누에 대해 무언가 긍정적인 생각을 해볼 수는 있다. 비누가 가진 씻김과 지움이라는 속성은 나를 새로이 하기 위하여, 갈고 닦음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화하려는 나에게는 아주 생산적인 도구일지도 모른다.


비누란 물건은 나의 오늘에 있어 완벽한 서사를 위해 필요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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