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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Mar 12. 2017

'관계'에 대한 최선의 답은 없지만 <세일즈맨>

영화는 만들어지는 시대나 문화 같은 당대적인 문제를 적잖이 반영한다. 이런 방식을 아주 목적적으로 관철한다면 리얼리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은 각자가 처해있는 환경과 상황에 존재한다. 이들은 각자의 환경과 상황의 흐름 속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 관객은 각자의 상황에 대입하여 영화를 읽고 해석하기도 한다. 인간은 리얼리스트니까.


나도 세일즈맨-거의 대체 가능할 단어로 샐러리맨-이기는 하지만, 비단 그런 이유 이외에도 <세일즈맨>은 관객으로서의 대입과 해석이 필요한 영화였다. 예상과는 달리 <세일즈맨>은 '세일즈맨'이라 표명한 일하고 돈 버는 인간을 주제로 한 영화는 아니었다. <세일즈맨>의 초점은 바깥의 사건이 나의 내부로 침투하여 그것의 나만의 내밀한 분노나 갈등이 되었을 때의 상황에 맞춰져 있다. 해결 혹은 처리, 소거가 필요한 상황에서 '관계인'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어떻게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가.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작품으로 연극배우 일을 하고 있는 부부 에마드와 라나는 살던 집에 문제가 생겨 부득이하게 이사를 가게 된다. 동료의 소개로 이사를 가게 된 집은 어쩐지 이상한 구석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전에는 매춘부가 살았던 집이었다.

부인 라나가 집에서 혼자 샤워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초인종 소리에 당연히 남편인 줄 알고 문을 연다. 그는 남편이 아니라 전에 살던 매춘부를 찾아온 남자였다. 그대로 열린 문으로 남자가 침입하고, 라나는 괴한이 된 그 남자에게 봉변을 당한다(확실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무언가 터부 되듯 묘사가 거부되는 걸 봐선 성폭행인 것 같다). 이 사고는 부인 라나에게 크나큰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주게 된다.

남편 에마드는 범인을 찾기로 한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쉬쉬하고 살아야 하는 게 많은-통념으로 가득한 보수적이고 경직된 사회, 경찰 조사에 연루되는 것이 그저 피곤한 일이라고 치부되는 결코 안녕하지 못한 이란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남편은 끝내 이 괴한을 찾아내고 모종의 복수 계획을 세운다. 사법 처리도, 금전적 보상이나 명예 회복도 어렵다면 그의 가족에라도 이런 사실들을 이야기해서 수치심을 줘야겠다는 심산으로.

부인 라나는 그러한 방법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알고 보니 범인은 몸이 성치 않은 불쌍한 사람이고 그의 부인을 비롯한 범인의 가족은 지극히도 그를 사랑하는 화목한(?) 관계 속에 있다. 이렇게 '깨뜨릴 수 없는' 그의 가족과 '깨뜨리기 힘든' 통념과 안일함이 고착화된 사회 속에서 그의 복수는 포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건 자신의 가족과 범인의 가족, 이웃들, 집을 소개해준 동료와의 관계가 모두 탈 없을 수 있는, 부당하지만 최선인 방법이다.


인간에게 있어 맺어진 관계란 단지 맺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관계의 유지와 그 지속성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안녕함이다. 유지는 나의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다른 이의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하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사회의 안정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사회를 내가 때때로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다. 이것은 결국 내가 어떤 문제를 풀고 싶을 때 온전히 나의 상황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말한다. 사회적인 조건과 위치 안에서 살아가는 내가 타인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의지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의지 그대로 행동할 수 없는, '저어하는;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상황은 때때로 발생한다. '걸리는 마음' '걸리는 관계'라는 게 아무리 내가 잘 무시하고 살더라도 사후에는 꼭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영화는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상황의 묘사를 문화적으로는 특수하지만 꽤나 보편적인 패턴으로 보여준다. 이야기는 특수할 수 있겠지만 문맥에 담겨있는 관계에 대한 고민의 결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세일즈맨>에서도 이러한 방식은 줄곧 지켜지는데, 상황으로부터 비롯된 외부적인 요인은 개인의 감정이나 염려와 섞여 바깥으로 밀어내 보인다. 이렇게 밀어내는 순간의 밀착성은 특히 그의 영화가 남편과 아내로 구성된 부부를 다룰 때에는 더욱 도드라지는 것 같다. 그의 영화 속 부부 관계는 이란이라고 하는 그들이 처해있는 국가와 문화적 상황에 덧대여 지면서 심도는 더욱 깊어진다. 이런 사실은 (중동에서 유달리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성 역할이라든지 젠더에 관하여 굳이 논하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영화에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세일즈맨>의 주요한 논점은 사실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연극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다. 주인공 윌리는 현대 사회의 남성, 남편, 아버지로서 살아가면서 본연의 바람과 행복을 언제나 추구한다. 그런데 그 과정과 결과, 이해의 맥락은 언제나 사람과 사회의 관계 속에 있다. 이 연극이 지고한 고전이 아니라 현대인의 현대적 비극을 다뤘다는 것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관계에 대한 고민은 나에게도 정말 큰 문제다. 그리고 이런 고민 행위를 아주 강한 힘으로 불러일으키는 영화들은 등장인물들이 아주 현실적인 언어를 내뱉으며 관계에 대한 문제가 곧 생활의 피로나 위안으로 전이되어 영화 속 인물들의 얼굴로 나타난다.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이건 '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화, 불안,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키는 타인과 관련한 문제가 된다. 이런 문제 해소를 위해서는 나의 가치와 견해가 정말 많은 것을 이해하거나, 참거나, 깨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런 방법들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 최선의 답을 찾아야 하는 것 같다. 관계란 참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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