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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Mar 06. 2017

사일런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들)를 보는 일은 어떤 역사의 흐름을 타임라인으로 보는 것과도 같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영화(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역사이며, 미국 이민자의 역사이기도 하고, 청년이 장년이 되고 이후에 노년이 되는 인간의 역사를 이르는 것이기도 하다. 이건 마틴 스콜세지 영화 간의 흐름이기도 하고 '영화 속' 인물과 환경으로 묘사되는 인간과 시대사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마틴 스콜세지가 영화를 많이 만들게 되면서 스타일이 확고한 작가가 되었다는 양적인 연유로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마틴 스콜세지의 전성기를 만든 수많은 필름 누아르들을 집대성해보니 어떤 역사가 나열되더라, 하고 깨닫는 건 그야말로 쉬운 일이다. 이런 양적 성취는 <에비에이터> 이전에 이미 어느 정도 완성이 된 것이기도 하다.


이제 마틴 스콜세지가 만든 영화는 아예 영화 내부에 천착하여 흐름-변화라는 역사성 자체를 좇아보는 방식으로 보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휴고>에서부터 이런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 같다. 어쩌면 이때 그의 징표와도 같은 스타일적인 접근을 넘어서야 함이 예견된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에비에이터> 이후로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는 드디어 그토록 영화화하고 싶었던 소설 '침묵'을 <사일런스>로 만들게 되었다. 조금 성급하게 이야기해도 된다면 <사일런스>는 마틴 스콜세지에게 있어 세 번째 막이 열리는 초석일지도 모른다.



<사일런스>는 몇 가지 인상 깊은 종교 영화의 플롯을 비슷하게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마도 종교인의 관점에서 <사일런스>의 메시지는 지극한 감동은 물론이거니와 신의 침묵에서 메시지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지침서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신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절대적인 교리의 가치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대사 그대로 "고통스러운 사랑의 실천"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 말이다.


<사일런스>의 주인공인 선교사에게 이 문제는 복음이 닿지 않은 곳에 종교의 뿌리를 내려야만 하는 신이 내어준 과제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 숙명은 결국 피를 부르고 나와 타인의 죽음의 문제로까지 번지게 된다.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순교를 결정하거나 혹은 배교를 하는 각자의 선택은 주체적일 수 있지만 그 판단과 평가는 누구의 어떤 잣대로 하는 것이 맞는지, 누군가를 위한 순교 혹은 원인과 동기에 기대어 있는 순교는 진정한 순교가 맞는지, 그리고 어쨌든 순교를 하게 된다면 도달해야만 하는 사후 세계에 대한 기대('파라다이스'라고 내내 이야기하는 바로 그 사후 세계)는 과연 어디를 향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화두를 <사일런스>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던진다.


이렇게 죽음과 맞물리는 믿음의 고난사는 종교 영화의 필수 플롯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사일런스>는 여기에서 좀 더 주인공의 인물의 얼굴에 다가간다. 이건 <사일런스>가 인물 중심으로 선교의 시대와 환경의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데에 천착한다는 말은 아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사일런스>는 본질적이지만 거대한 문제-생명을 걸어야만 하는 순교-를 내내 로드리게스의 얼굴에 짊어진 채 전개된다. 마틴 스콜세지 영화의 주인공들이 예의 그러했듯 <사일런스>의 주인공 로드리게스 역시 스스로 선택한 선교라는 인생행로에서 최선으로 옳은 방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 와중에 그는 수 없이 많은 시험에 빠지고 독백하는 자문자답의 방식으로 원하는 답을 찾으려 한다.



종교와 믿음의 문제 역시 결국에는 환경 속 개인에게 주어진 '선택 가능한' 삶의 양식 중 하나이기 때문에 최선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분히 인간적인 고통이 영원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답 역시 절대적인 교리대로 풀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삶을 사는 나 자신이 어떤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내야만 하는가 하는 주관의 문제에 가깝다. 즉 <사일런스>를 준엄한 종교적 메시지의 영화로 보는 것이 아닌 개인에 대한 이야기로 보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답은 여기에 있다. 마틴 스콜세지는 그토록 영화화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풀어서 보여주어야만 했던 자신의 고해성사를 영화에 빌어서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틴 스콜세지의 그동안 영화들 역시 자서전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일런스>에서는 보다 더 주인공이 내레이션으로 읊는 고난에 대한 독해를 필요로 한다. 이건 이 영화가 종교 영화의 관습을 따른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자연인 마틴 스콜세지가 그 누구보다도 인간 본연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데 종교의 차원을 벗어나기 힘든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가 그동안 구축해 놓은 장르 영화의 역사를 되짚어 보다가 <사일런스>를 보면 무언가 전복적인 것 같다고. 하지만 그동안의 마틴 스콜세지 영화의 인상 깊은 장면들을 생각해보면, 강박증적일 정도로 그 번뇌를 바깥으로 분출하여 어떤 식으로든 깨트리고야 말았던 주인공은 항상 있었다.


마틴 스콜세지의 시간에는 뉴욕의 역사가 있고, 페르소나의 역사가 있다. 이런 나열이 단지 형식과 테마에 대한 것이라면, 노인의 반열에 이른 지금의 <사일런스>는 의식적인 내용까지 이렇게 역사로 보여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일런스>는 그 역사의 정점에 이르기 위하여 찍힌 점들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사일런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를 여전히 당대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에 기쁜(?) 나머지 구체적인 감흥 없이 좀 장황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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