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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Mar 01. 2017

드라마라서 더욱 압도된다 <눈길>

'눈' 하면 어떤 이미지들이 생각나는가? 하얗고 폭신하다. 손에 닿을 땐 산뜻하지만 이내 녹아버리면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린다. 차갑지만, 그래도 따뜻하다. 회색 비처럼 슬플 수도 있겠지만, 하얀 눈이 되어 내렸기 때문에 포근하고 아름답다.


수많은 날씨 요소 중에서도 '눈'은 왠지 이중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슬프지만 순수하게 아름다운 감정을 극대화하려는 풍경 속에 깔린 하얗디 하얀 눈은, 그야말로 슬프지만 찬연하게 보는 이를 압도시킨다. 이건 영화나 드라마 속 장면으로 볼 때도 그렇고 겨울이라는 계절의 일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내리는 눈, 쌓인 눈을 본 최근의 겨울을 생각해 본다. 정말로 사람들은, 그들 각자의 눈 속의 쓸쓸함과 압도된 풍경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버린-그러나 아직까지도 소녀들의 시절이 '이야기'가 되는 데에 너무나 인색한-위안부 소녀들의 아픔을 다룬 영화 <눈길>이 영화로 나왔다. 원래는 드라마 포맷으로 TV 방영되었으나 러닝타임을 늘려 영화 판본으로 다시 태어났다. 


<눈길>의 객관적인 정보는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충분하다. 더 무엇을 영화라는 잣대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한번 보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사실 역사의식으로 무장한 채 으레 하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영화를 보기 전에 무언가 고민되는 것도 있다. 바뀌지 않은 시대와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는 사회적인 콘텍스트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의 당위성에 미리 압도되어야 하는 것인가? 영화의 미학적인 가치엔 관대해져야만 하는가? 이런 '어쩔 수 없는' 문제들 말이다.



물론 이 문제들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눈길>의 메시지와 의식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애초에 드라마로 제작된 만큼 플롯은 시작부터 타이트하게 짜여있고, 카메라는 배우들의 얼굴과 대사에 너무 가깝게 들어서 있다. 배경 음악과 갈등을 촉발하는 연결고리가 지극히 드라마스럽다는 느낌도 지울 수는 없다. 그러니까 <눈길>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아쉬운 점이란, 관객들에게 너무나 드라마적인 모습으로 100% 이상의 정보를 영화적으로 형성된 시간 속에서 흘러넘치게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눈길>은 이런 조건들 때문에 무언가 예상이 되는 시절의 풍경과 이미지로 뒤덮여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직후 관객들이 했던 "만듦새가 영화스럽지 못해 아쉽다"는 식의 말들을 굳이 사후에 엿듣지 않아도 예견된 것이기는 하였다. 애초에 TV 플랫폼의 안방 시청자를 대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관객이 마주한 극장 스크린의 크기에 대응하는 리듬으로 영화가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더군다나 주인공인 김새론과 김향기가 어떻게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며,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는 배우들인가를 알고 있다면 이들이 TV 화면에 등장해 열연하는 압도감에서, 그리고 그 압도가 주는 슬픔에서 빗겨 나와 극장에서 <눈길>을 보는 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사실이 <눈길>의 미덕이라 이야기하고 싶다. 위안소에서, 그리고 그곳을 힘겹게 빠져나와 고향으로 도망치려 1년을 걷는 눈길 위에서 이렇게 '어린 얼굴을 가진 어린 사람들' 정말로 있었다는 사실적인 표정으로 김새론과 김향기가 영화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새론과 김향기의 유달리 아이 같은 얼굴은 그야말로 시절의 사실감을 얼굴의 나이로 보여주면서도, 제작 자체가 드라마였기 때문에 드라마틱하게 클로즈업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서 이 배우들이 보여주는 지극히 '애어른'과 같은 상황은, 너무나도 어른이어야만 하는 상황이어서 더욱 슬플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어른'은 정신연령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이기 때문에 겪어야만 하는 생활의 상황을 말한다. 직접적으로 위안부의 극악한 신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시절, 이렇게 어린 사람들의 생활의 모든 순간들은 슬픔과 폭력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슬픔의 시간들을 위로받기 위하여 이 어린 사람들이 도망치는 곳은, 그리고 끝도 없이 걷는 그 공간들은 '눈길'로 나타난다. 



'눈'은 새하얀 색깔과 쌓인 풍경의 압도감 때문에 별 다른 효과를 주지 않아도 화면을 특별하게 만드는 데에 탁월하다. 게다가 추위가 주는 서글픔은 촉각적인 공감을 일으키기에 더욱 슬프다. 영화 <눈길>은 바로 이런 공감각이 불러일으키는 촉각적인 경험을 관객의 경험으로 간접적으로 전이시켜 공감을 이끌어 나간다. 시절의 잔혹함을 1차적으로 그리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이러한 감각의 공감으로 가득 찬 <눈길>은 그래서, 화면에 가득 찬 눈과 그 눈 위에 쌓인 시절의 아픔이 드라마적으로 가득 차 있어서 더욱 영화적인 순간으로 빛나고 있다. 


눈길은 하얗고 순수하고, 고향의 정서를 그릴 수 있는 공간이다. <눈길>은 이렇게 관객의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 예상을 지극히 파고든다. 바로 TV 드라마로 만들어진 그 특성을 갖고서 말이다. 눈은 흩날리고 쌓여 세월이 흐른 지금에까지 그 시절을 잊을 수 없게 하는 듯이 길에 쌓인다. 그리고 할머니가 된 주인공이 지금도 순수하게 그 시절을 그릴 수 있는 감정의 매개가 되어 영화가 끝날 때까지 흩날린다. 영화를 다 보고 극장 바깥으로 나왔을 때 실제로 눈이 내렸더라면 정말이지 슬펐겠지만, 다행히도 봄의 시작인 3월이 다 되어 눈이 내리지는 않았다. 이런 봄 같은 시절이, 영화 안에서 바깥으로 튕겨져 나오는 현실의 맥락에도 찾아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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