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달 Jul 18. 2016

옥희의 영화

“데라보모/ 지즐케라/ 봄바” <옥희의 영화>의 제1장‘주문을 외울 날’은 남진구(이선균)의 주문 외우기로 시작된다. 두 번 반복하여 읊는 남진구의 주문은 의미 없는 음절들의 기이한 나열이라기보다는 마치 의미를 가진 단어들의 연쇄 발화인 것처럼 들린다. 이것은 그가 현관을 나서면서 하늘을 쳐다본 뒤 짓는 의미심장한 미소에서 읽을 수 있듯이, 현상 인식과 표현 방법에 대한 자신만의 통쾌한 깨달음으로 인해 뱉어진 감탄사이다. 단순히 ‘하늘이’, ‘파랗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그러한 일상 언어의 합리적 배열로는 세계의 의미에 도달할 수 없는 것, 홍상수에게 있어 ‘생활의 발견’은 일상 언어 체계를 초월한 본질적 의미 표현의 발견이다.


남진구가 제자를 호통하면서 가르칠 때 힘주어하는 말, “인위를 통할 때 진심으로 갈 수 있어!” 사회적으로 약속된 자연 언어가 아닌, 오히려 본질에 더 가까운 인위의 발화를 보여줄 때 비로소 홍상수의 진심은 통한다.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자신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진심의 독법과 화법으로 세계의 일면을 표현하는 독특한 말하기 이자 관객에게 던지는 기묘한 영화적 주문이다.


언어를 습득한 인간의 일상은 바로 그 언어적 사고 체계에 의해 수많은 현상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에 지배된다. 기실 모호하면서도 불확실한 세계의 실체를 언어라는 그릇을 이용하여 구체적인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약속된 틀에 묶인 세계의 실체는 사고 주체가 선택한 그릇들의 정연한 배열을 통해 언어의 논리 속에서 그 윤곽을 드러낸다. 나아가 그것은 시간 순행적 논리, 서사의 논리 속에서 나타난다. 이로 인하여 마치 현상 세계는 언어와 서사 구조 속에서만 유기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연 혹은 무의미의 내러티브로 가득한 홍상수 영화는 그렇기 때문에 서사 영화 특유의 거대 통합체를 이룩해 내지 못하며 일견 이미지의 분산으로 나타난다. 그래서일까? 홍상수의 영화는 일상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남진구를 만난 송교수는 돈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는 영화 예술의 현실에 대하여 말하면서 비통함을 감추지 못한다. “책(서사)으로 돌아갑시다.”


사건 혹은 대상 지시의 기능을 가진 언어와 서사에 대한 홍상수의 의문은 <옥희의 영화> 곳곳에서 나타난다. 본질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그 어떤 것이지만 본질에 앞서 언어로 형상화되어 듣게 되는 ‘말’ 때문에, 즉 본질이 아닌 대상을 지시하고 있는 언어라는 껍데기가 가진 속성 때문에 남진구는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남진구의 부인 혜림은 실수로 그를 ‘영수’라고 부르고 그는 그녀가 실수로 말한 영수가 대체 누구인지 혹시 사촌 형은 아닌지 생각한다. 단지 들은 것은 ‘영수 씨’라는 3음절 일뿐이지만 남진구에게는 3음절 이상의 큰 의혹으로 증폭된다. 우연히 만난 여자가 Nikon 카메라를 ‘나이콘’이라고 읽는 것을 비웃으면서, 그것은 ‘나이콘’이 아니라 ‘니콘’이라고 지적하는 것 또한 말이라는 것이 대상의 진의에 온전히 닿지 못하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 빗겨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진구가 학교 회식자리와 극장 GV에서 듣고 말하게 되는 각종 ‘소문들’ 또한 서사라는 의미 매개체가 본질을 전달하는 데 있어 얼마나 무기력하였는지를 보여준다. 회식 자리에서 그는 송교수에 대한 소문을 ‘쉬운 말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꼴을 하고 있지만 GV에서 한 관객이 자신에 대한 과거의 소문을 공개적으로 말해 망신을 당하게 되자 도리어쉬운 말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말라고 화를 낸다.


1장에서 벌어진 갖은 말싸움과 말로 인한 해프닝은 남진구가 늦은 밤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것으로 종결되고 필기체로 쓰인 2장이 열리면서 남진구는 2장의 진구로 재등장한다. 여기서부터의 인물과 공간의 재등장은 1장의 의미 소통의 실패에 대한 새로 쓰기이다. <옥희의 영화>의 2, 3, 4 장에서는 언어 및 합리적인 서사 체계가 실패한 진심에의 도달이 그의 영화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방법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진구는 시공간 안에서 연장(延長)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물체 자체(우유팩)에 대해 의문을 가짐으로써 물체의 진심에 도달하려 한다. 송교수가 토해 낸 살아 움직이는 낙지는 목구멍을 통과했음에도 가공과 소화를 거치지 않은 ‘날 것’, 영화화하고 싶은 순간 그대로의 진심이다. 


옥희는 반복된 아차산의 경험을 이미지화하여 조각된 짝패로 보여준다. 반복되는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반복 속에서도 차이는 존재한다는 현상 분석적인 언술이 아니라, 반복 경험을 무한한 틈새로 벌려 놓아 그 사이에서 발견되는 차이의 크기를 벌리거나 좁히는 영화 이미지의 운동 그 자체이다. 요컨대 <옥희의 영화>는 진심 혹은 진짜 의미로의 도달에 대한 홍상수식 방법론 모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진심만은 말로 표현되는 것이 더 설득력을 얻기도 한다.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극장전>의 동수가 그랬던 것처럼 옥희 또한 죽는 게무섭다는 것을 기어이 말로 표현한다. 아직 도달할 수 없고, 도달하기 무서운 그것은 진심이 담긴 말을 통해서만 체현될 수 있을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