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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May 15. 2017

내가 본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각자에게는 관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관점이 나의 세계를 만든다. 정확히는 나의 관점이 한정하는 나의 세계를 만든다가 맞을 것이다. 세계라는 바깥의 진짜 존재와 현상들은 무한으로 뻗어있으며 시공간의 한계를 초월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그야말로 외향의 복잡한 관계의 거미줄로 뒤엉켜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나의 관점에 접해지는 순간 많은 것들이 한계를 갖게 된다. 엉킨 걸 때로는 풀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한계는 사실 너무나 커서 세계라고 기어코 이야기하는 것이 때때로는 그 순간과 상황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무한대의 요소들을 무참히 억누르는 듯한 느낌까지 준다. 모두 담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고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그래서 지나간 일이나 상황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겉으로는 객관적이고 수평적인 지평선에서의 경험 전달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인 듯 하지만, 사실 이런 행위의 모든 기저에는 나의 경험이라는 지평이 있고, 그중에서도 관점의 지배를 받는 '인상적으로 본 것'에 주로 맞춰진다. 혹은 관점을 그대로 노출하는 그 자체, 혹은 이렇게 나의 관점으로 하는 이야기를 들은 타인의 동의나 맞음이라는 확인을 억지로 받기 위한 일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틀리다 혹은 맞았다는 판단을 물론 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였다고 해서 온전히 불변으로 '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은, 그리고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서 나의 이해의 지평을 노출하는 것 그뿐일 수도 있다. 관점이라는 틀로 길어 올린 내 경험의 이야기는 내가 가진 관점이라는 틀의 포맷이나 초점이라는 형식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이야기를 함으로써 나의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해보라고 타인에게 건네는 시도는, 그래서 사실상 나의 관점과 지평이 어떤 것을 중요하게 보고 듣는지를 이야기하는 설득의 해석학에 다름 아니다.


내가 이해한 세계 그리고 관계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런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서 스스로 해야만 하는 판단과 주관의 견지를 그저 밀고 나가는 것, 내가 나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제 <극장전>을 보며 또 한 번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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