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 여름이었다

by 홍노을

수술날 이른 아침, 남편은 다행히 아무런 이상 없이 아이가 있는 병원으로 돌아왔다.

수술 안내를 받으며 각종 서류에 서명을 하고, 그 이후는 긴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아침 일찍 예정되었던 수술이 오후로 미뤄지면서 아이의 금식도 길어졌다.

지치지도 않고 울어대는 아기를 달래려니 시작도 전에 진이 다 빠져버렸다.

쪽쪽이도 뱉어내며 끝없이 오물거리는 조그만 입이 애처로웠고, 그 와중에 귀엽기도 했다.

마르지 않는 눈물과 찰나의 웃음 속에 잠시간의 이별이 다가왔다.


수술실로 내려가는 길, 간밤의 환란에도 잘 버티던 아빠마저 눈물을 쏟았다.

나는 전날부터 아이와 부대끼고 있었지만,

남편은 혼자 떨어져 있었기에 수술실 배웅은 남편에게 안겨 보냈다.

흠뻑 젖은 얼굴로, 뒤에선 보이지도 않는 작은 아기를 안고 들어가던 뒷모습이 잔상처럼 남았다.

심장수술 중에서는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기에 케이스도 많고 예후도 좋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만에 하나의 경우를 안내받고 동의하는 과정을 거치며,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슬픔은 감출 길이 없었다.


이후는 더욱더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큰 병원을 한참 동안 배회하다가 더는 갈 곳이 없어져 대기실에 들어갔다.

딱딱한 의자에서 하염없이 안내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오히려 수술이 시작된 후에는 두려움이나 슬픔이 가라앉았다.

곧 끝난다는 막연한 기대감과 무슨 일이 기다릴지 알 수 없는 불안이 함께 했다.

폭풍 전야와 같은 고요한 기분이었다.


들어간 지 5시간이 지나고 수술이 끝났다는 안내를 받았다.

아기는 중환자실로 이동하고, 우리는 담당교수님의 간략한 안내를 들었다.

길지 않은 대기 후에 중환자실에서 잠든 아기를 잠시 볼 수 있었다.

수술 일정을 잡을 때부터 이때 부모들이 많이 무너진다는 경고(?)를 들었다.

각종 연결관과 주사약, 수술 후 처치 흔적까지 낯설고 더 심각한 듯 보이기 때문이라 했다.

그런 충격 때문인지, 경황이 없어서인지, 수술 직후 아기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이 호명되고, 몇 개의 문을 열고, 전달할 아기 짐을 문 입구에 내려놓고,

아기를 향해 걸어 들어가면서 눈에 담은 주위 모습까지만 떠오른다.

처음 가 본 소아 중환자실, 빼곡한 의료 장비들, 신생아 침대를 둘러싸고 서있던 의료진들,

한 줌만 한 아기에게 주렁주렁 매달린 주사들, 여린 몸을 뚫고 박힌 수 개의 관들.

그나마 수술 부위는 이미 처치가 마무리되어 보이지 않았다.

숨조차 깊이 내쉬지 못했던 굳은 긴장감, 솜털이 쭈뼛대던 서늘한 온도와 함께,

얼굴은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 기억의 조각만이 남았다.


중환자실 면회는 하루 15분간 보호자 1명만 가능했다.

나는 조그만 아이 몸에 주사와 관들이 빼곡한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때마침 남편의 휴가도 얼마 남지 않았어서, 남편이 중환자실 초반 면회를 다녔다.

중환자실 앞은 대기 의자가 없었다.

나는 병원 별관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멍하니 앉아 기다렸다.

당시 나는 세상인지, 운명인지 모를 무언가를 향한 원망에 깊이 빠져있었다.

그런 나를 붙잡은 것은 의외로 병원의 한 길목이었다.

그곳은 저마다의 아픈 사연을 담은 발자국이 매일매일 쌓여가는 곳이었다.

여기 나만이 슬프고 힘겨운 것이 아니었다.

그 길목에는 간절한 발걸음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맘때 서울은 장마가 한창이었다.

새로 옮긴 숙소에서 일주일 간 중환자실 면회를 다녔다.

매일 같은 옷을 걸치고, 맨발에 크록스를 신고서 아침마다 버스에 올랐다.

그해 우리의 여름휴가였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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