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by 홍노을

남편은 출산휴가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아기는 아직 일반병동에 올라갈 정도로 회복되지 않았다.

설명에 따르면 지표상 무언가가 나쁜 것은 아니었고,

너무 어려서 회복과 적응에 시간이 더 걸리는 거라고 했다.

아이가 일반병동으로 올라갈 때까지 여전히 면회만 가능했다.

숙소를 연장하기엔 기간도 알 수 없고 비용 부담도 적지 않아서 고민스러웠다.

나까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서울에 연고가 없는 나는 오송의 언니 집에서 면회를 다니기로 했다.

하루 15분이라도 아기를 보기 위해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며 매일 서울로 향했다.


일반병동에 가면 모유를 먹이기 위해 여태껏 2-3시간마다 유축을 해가며 기다리고 있었다.

한여름에 모유를 얼려 다닐 수 없으니, 아까워도 유축한 모유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밤에도, 낮에도, 기차역 수유실에서도, 병원 화장실에서도.

때가 되면 퉁퉁 부은 가슴이 아파 선 채로 유축을 하고 흘려보냈다.

아기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에도 유축 때문에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그래도 조만간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아기도 힘겨운 시간을 잘 이겨내고 있었다.

수술로 인한 얼굴의 부기가 점차 빠지고, 어느새 갓난아기의 태를 벗어가고 있었다.

조그맣던 아기는 중환자실에서 신생아기를 지나 영아기를 맞이했다.

수술할 즈음 위쪽 머리카락이 유독 많이 빠졌는데, 약 때문인가 싶어 듬성한 앞 통수가 안타까웠다.

(그러면서도 영화 속 전두광 같다며 사진을 보고 웃기도 했다)

알고 보니 이때 원래 배냇머리가 빠지는 시기였다.

아픈 와중에도 성장과정을 밟아가며 조금씩 자라고 있는 아기가 기특했다.

엄마 품이 아닌 차가운 병실에서 혼자 커가는 모습이 못내 서럽기도 했다.


드디어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다른 수치와 지표들도 무난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약을 하나씩 줄여가며 조금 더 안정되면 일반병동으로 갈 수 있다며 예정된 일정을 알려주었다.

이제 15분간 만나는 동안에도 아기는 눈을 맞추고 꼬물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장 힘겨운 시기가 끝나간다는 안도를 느꼈고 며칠간 돌아가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일반병동으로 전동이 예정된 날, 아이와 함께하는 기대감을 안고 중환자실로 향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로 인한 합병증이 있는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일반식에 적응해야 일반병동으로 갈 수 있기에 콧줄을 통해 식이 적응을 준비했다.

그런데 아이는 우유가 들어가면 폐 부근의 흉관으로 희뿌연 액이 차올랐다.

어린 아기들에게 심장 수술 후 간혹 발생하는 유미흉이라는 합병증이었다.

수술 과정에서 림프관이 건들릴 경우 생길 수 있는 증상이라고 했다.

진단 확정을 위해 추가 검사가 필요했다.

우선 금식으로 자연적 치료, 개선이 없으면 약물 치료, 그래도 안 되면 또다시 개흉 수술을 해야 했다.


어떠한 상황에도 의연하겠다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겨우 추스른 마음은 또다시 분노, 원망, 슬픔, 자책으로 뒤엉켜버렸다.

이를 악문 채 합병증에 대한 설명과 변경된 앞으로의 일정만 꾸역꾸역 받아 적었다.

가족들에게 전달하는 카톡을 쓰며 그제야 눈물이 쏟아졌다.

눈길도 신경 쓰지 못한 채 병원에서, 기차역에서 한참을 울었다.

가슴 깊이 뜨거운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원망도 슬픔도 향할 곳이 없었다.

내리쬐는 햇볕과 귓가를 울리는 매미소리마저 야속할 뿐이었다.

돌아가는 발걸음은 더 깊은 진창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처음에는 설마 이런 게 의료사고인가 충격받았다.

하지만 워낙 작은 아기의 수술이다 보니,

여러 합병증의 발생 가능성에 대해 수술 전에 모두 안내받은 일이었다.

여전히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저 남일 마냥 아이의 쾌유를 바라고,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부디 더 독한 약이나 수술 없이 금식만으로 자연히 막히기를.


결국 합병증으로 입원기간이 훌쩍 늘어나게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입원도, 합병증도, 금식도, 재수술의 가능성도, 모든 것이 청천벽력 같았다.

수술이 끝나면 젖을 물리려고 한 달 넘게 유축으로 버텨왔는데 더 길어진 금식이라니.

심지어 차도가 보이더라도, 퇴원 이후에도 몇 달간 특수분유를 먹여야 했다.

결국 누구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나는 단유를 해야 했다.

생각보다 아이를 품에 안고 사랑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끝나지 않는 풍파 속에서 나는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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