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디플레이션, 협력의 인플레이션

by 캡선생

보통 연말이 되면 다음 해를 준비하려는 마음으로 트렌드 서적이 쏟아진다. 서점에 가면 비슷한 키워드와 전망이 가득하고, 대개는 “내년엔 이런 것이 뜹니다”라는 식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송길영의 시대예보 시리즈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단순히 무엇이 유행할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흐름이 생기고 우리가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묻는다.


송길영 작가는 스스로를 ‘시대의 마음을 캐는 사람’, 마인드마이너라고 소개한다. 이 표현이 꽤 적확하다고 느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훑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선택과 불안, 욕망과 이동의 방향을 데이터와 관찰을 통해 읽어내는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도 단순한 전망서라기보다, 시대의 기류를 해석한 보고서에 가깝다.


‘시대예보’라는 이름도 잘 지었다. 일기예보가 비 오기 전에 우산을 챙기게 하듯, 시대예보 역시 변화를 미리 감지하게 만든다. 2년 전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작년 《시대예보: 호명사회》에 이어 올해는 《시대예보: 경량문명의 탄생》으로 이어지는데, 이번 책에서 눈에 들어온 건 ‘경량’이라는 단어였다. 문명이라는 묵직한 단어 앞에 경량을 붙이니 처음엔 조금 낯설다. 그런데 읽다 보면 이 단어가 지금 세상을 설명하는 데 꽤나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말하는 경량문명은 단순히 작은 조직의 시대라는 말이 아니다.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가볍게 협력하는 구조가 경쟁력을 갖는 시대라는 뜻에 가깝다. 예전에는 큰 조직, 많은 직원, 복잡한 체계가 안정성과 신뢰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이른바 ‘대마불사’라는 말도 그런 시대 감각에서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꼭 그렇지 않다. 오히려 큰 몸집이 의사결정을 늦추고, 복잡한 보고 체계가 조직을 무겁게 만들며, 그 무거움 자체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책을 읽으며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작다’와 ‘가볍다’는 다른 말이라는 점이었다. 직원 수가 적다고 해서 바로 경량조직이 되는 건 아니다. 사람 수는 적어도 결재 단계가 많고, 눈치와 보고가 복잡하고, 움직임이 둔하면 그 조직은 이미 무겁다. 반대로 규모가 어느 정도 있어도 의사결정이 빠르고 협업이 유연하면 그건 경량에 가깝다. 결국 핵심은 크기가 아니라 무게다. 이건 조직 이야기 같지만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혼자 일해도 머릿속이 무겁고, 미루는 일이 많고, 실행보다 준비만 길다면 전혀 경량적이지 않다.


송길영은 이 경량문명을 움직이는 축으로 ‘지능의 범용화’와 ‘협력의 경량화’를 말한다. 이 두 표현은 어렵게 들리지만, 막상 풀어보면 지금 우리가 체감하는 변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능의 범용화는 이제 고도의 사고력과 정보처리 능력이 일부 전문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AI 덕분에 누구나 이전보다 훨씬 강한 도구를 손에 쥐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중요한 건 AI가 인간을 대체하느냐가 아니라, AI를 자연스럽게 다루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앞서게 된다는 점이다. 인터넷을 처음 배울 때도 비슷했다. 초기에 익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엔 시간이 갈수록 큰 격차가 벌어졌다. AI도 아마 그렇게 갈 가능성이 높다.


협력의 경량화라는 말도 흥미롭다. 예전처럼 한 회사 안에서 오래 버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필요할 때 프로젝트 단위로 연결되고 다시 흩어지는 방식이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상사에게 잘 보이는 능력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 다시 같이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실력만으로는 부족하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필요해진다. 책에서 말하는 ‘매력자본’이라는 개념도 그래서 납득이 갔다. 예전에는 실력과 인간미를 따로 봤다면, 이제는 그 둘이 거의 분리되지 않는다. 같이 일하기 불편한 사람은 아무리 뛰어나도 점점 선택받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가고 있다.


이 책은 “세상이 이렇게 변하니 큰일 났다”라는 단순 불안감을 조장하기 보다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로 시선을 옮긴다. 송길영은 개인이 경량문명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문성을 증강시키고, 노동의 템포를 조절하고, 외로움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셋은 따로 떨어진 조언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로 연결된다.


전문성을 증강시켜야 한다는 말은 결국 나라는 사람의 쓸모를 계속 업데이트하라는 뜻이다. AI가 생겼다고 해서 인간의 역할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 고유의 방향 설정과 판단, 맥락 이해가 더 중요해진다. 다만 예전 방식 그대로는 버티기 어렵다. 혼자서 모든 걸 다 잘하려 하기보다, AI라는 도구를 붙여 자기 능력을 확장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이제 개인도 일종의 자영업자처럼 자신의 역량을 시장에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다는 말이 꽤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노동의 템포를 조절해야 한다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경량문명은 빠른 시대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빨라야 산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자기 리듬을 잃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일한 만큼 수익이 나는 구조에서는 무리하기 쉽고, 무리하면 결국 번아웃이 온다. 개인 단위의 생산성이 중요해질수록, 자기 몸과 감정의 리듬을 다루는 능력도 경쟁력이 된다. 예전엔 성실함이 오래 앉아 있는 시간으로 증명되었다면, 이제는 지속 가능한 템포를 설계하는 능력으로 증명되는 시대에 가까워진다.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다. 경량문명은 효율적이고 날렵한 시대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개인을 홀로 서게 만드는 시대이기도 하다. 모두가 자영업자처럼 살아가는 구조에서는 늘 곁에 있는 동료가 없을 수 있다. 회사라는 울타리가 줄어드는 만큼, 정서적 고립은 더 일상적인 문제가 된다. 이 책이 외로움을 감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생존의 문제로 다룬 것이 좋았다. 앞으로는 실력뿐 아니라 외로움을 견디고 관리하는 힘도 중요한 역량이 될 것이다.


트렌드 책은 대개 한 시즌이 지나면 힘이 빠지기 쉽다. 그런데 이 책은 단순한 유행 정리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의 일 방식과 관계 방식, 생존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꽤나 오래 남지 않을까 싶다. 변화가 너무 빨라 불안한 사람, 조직의 미래보다 개인의 방향이 더 중요해진 시대를 체감하는 사람, 그리고 AI 이후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감이 잘 안 오는 사람에게 한 번쯤 권할 만한 책이다. 내년의 유행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떤 무게로 살아가야 할지를 점검하고 싶다면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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