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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Sep 27. 2022

"행복하세요"라는 말의 위험성


예전에는 '행복'이 삶의 목표였다.


모든 것의 기준은 '행복'이었고, 누군가에게 단 하나의 메시지전해야 한다면 그것은 단연 "행복하세요"였다. 이렇게 행복에 집착 아닌 집착을 하던 나에게 군 동기가 말을 했다.



형, 그렇게 행복만 생각하면 행복하지 못해. 진짜야.



이런 말을 한 동기는 재벌 3세였다. 부족함 없이 자란 그였기에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생각은 입밖에 꺼내지 않았고 그럼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냐고 묻지도 않았다. 괜히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그렇게 내 머릿속에 엉켜버린 실타래로 남았다. 그것을 스스로 풀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그와 이야기를 하면 금방 풀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였다. 스스로 답을 찾아야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무언가와 지속적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행복'의 어원이 그러했다.


행복에서 '행'은 '다행 행(幸)'으로 '좋은 운, 요행' 등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한 '운'을 의미한다. 이는 영어도 마찬가지다. 행복을 의미하는 'Happy(행복한)'는 '운'을 의미하는 'hap'과 '상태'를 의미하는 'y'가 결합된 구조다. 즉 한국어도 영어도 행복은 '운'이라는 요소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행복이라는 것이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숫자처럼 무작위로 발생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분명 어떠한 패턴을 읽을 수 있다. 행복에 관해 수천 년을 고민했던 철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1. 나를 잊을 정도로 무엇에 몰두할 때

2. 타인(크게는 사회)에게 선한 행위(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할 때

3. 극도의 긴장(혹은 고통)이 단숨에 해소될 때


"고통의 부재가 행복(기쁨)"이라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같이 다른 의견들도 있으니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다수의 의견은 위 세 가지로 좁혀지는 것 같다.


어원도 그렇고 철학자들이 이야기를 봐도 그렇고 행복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었을 때 오히려 행복하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 행복은 무엇인가의 부산물이지 그 자체가 목표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나니 다른 사람에게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게 되었다. 파스칼 브뤼크네르 "행복하냐고 질문하는 것 자체가 이미 답을 오염시키는 행위다"라고 말했는데 "행복하세요"라는 말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행복했던 사람도 본인의 행복이 진짜인지 의심할 수 있고, 다른 목표를 추구하며 행복에 가까워지고 있는 사람도 행복이 목표가 되어 오히려 행복에서 멀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다른 말도 그렇지만 '행복'이라는 말을 타인에게 전할 때는 유독 조심하게 되었다.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역설적으로 쉽게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득이 어떠한 메시지를 타인에게 전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행복' 대신 '평화'를 말하게 되었다(눈치챈 분도 있겠지만 종교의 영향이다). 이것도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이 현재 내가 전할 수 있는 최선이다.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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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tan B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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