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정확하게는 '현재의 나'를 위한 글쓰기이기에 우당탕탕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리는 것 같다.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즐겁다. 즐겁기 때문에 다시 우당탕탕 소리를 내면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300일 동안 매일 글쓰기를 하게 만든 것이 바로 '현재의 나'이다. 다시 말해 글을 쓰는 '이유(why)'가 '현재의 나'이다.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니것은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그의 의도는 나처럼 본인 만족을 위해 쓴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한 명의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쓴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나는 스스로를 위해 글을 쓴다. 더 정확히는 '과거의 나'를 상정하고 글을 쓴다.
'과거의 나'는 '어떻게(how)'를 담당한다. 누구보다 책을 멀리하고 독서를 싫어했던 20대 초반의 나를 독자로 상정하고 글을 쓰다 보면 어떻게 써야 할지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조금만 복잡해도 읽기 싫어하던 '과거의 나'를 위해 '간단명료'하게 쓰고, 또한 금세 싫증내고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던 기질을 고려하여 최대한 '신선한 시각'을 담아야만 했다. 이렇게 해야만 20대 초반의 나의 시선을 잡아둘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나의 글쓰기는 '현재의 나'의 취미이자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존재한다. 바로 '미래의 나'이다.
글쓰기에 있어 나는 완벽하려고 하지 않는다. 실수는 기본값이자 장려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미래의 나'가 더 많은 경험과 더 나은 지혜로 '현재의 나'가 저지른 실수를 멋지게 개선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모든 글쓰기는 '미래의 나'를 위한 메모라고 볼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과거의 나'는 독자, '현재의 나'는 작가, 그리고 '미래의 나'는 편집자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나의 키보드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를 위해 지금도 요란스럽게 울리고 있다.
P.S.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소설을 쓸 때 '작가'와 '독자' 이외에 '장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장어'의 역할은 '작가'와 '독자'가 합의가 되지 않을 때 혹은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 대답을 구할 수 있는 상상의 대상이다. 하루키가 한국인이었다면 '장어'가 아닌 '김치'이지 않았을까 싶다. (참조 문헌: 우치다 타츠루의 <스승은 있다>(민들레,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