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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만 머무르지 않겠다는 다짐, 책을 쓸 결심

by 캡선생


※ 인물을 특정하지 않기 위해 일부내용을 각색했습니다.



책은 뭐 아무나 쓰나요?



나중에 책 한 번 써보면 어떻겠냐는 아버지의 말에 반사적으로 답을 했다. 책을 쓰는 행위, 그런 행위를 하는 작가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의사 면허가 없는 사람이 함부로 타인의 몸에 칼을 대면 안되듯이, 작가 면허가 없는 내가 함부로 종이에 펜을 대면 안된다고 생각을 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책을 써서 뭐 할 건데?' '요새 누가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는다고?' '책으로 돈 버는 것은 로또 맞는 수준이라던데?'와 같은 자기변명이 나를 점점 더 책 쓰는 행위와 멀어지게 만들었다. 마치 먹지 못하는 포도를 바라보며 "저 포도는 분명 너무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라고 합리화하는 여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라는 여우는 포도가 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번의 강렬한 경험을 통해서.




첫 번째 포도


삼성물산을 퇴사하고 명함에는 유효기간이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잘나서 얻었다고 생각한 모든 기회와 혜택은 명함 위 ‘삼성’이라는 타이틀 덕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퇴사 후 명함의 유효기간이 끝나자 나는 그 어떤 수식어도 없는 이름 석자로 다시 남게 되었다.


은행에는 기존에 느끼지 못했던 문턱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웃는 목소리로 전화를 해오던 이들의 전화는 점차 잦아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면 예전과는 다른 눈빛을 마주하곤 했다. 자격지심 때문에 현실을 왜곡해서 보는 건지, 아니면 현실이 변한 것인지 헷갈리던 시기에, 이는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퇴사 후 '삼성'이라는 자리에 다른 대기업 이름을 빠르게 넣은 선후배들을 제외하고, 나처럼 홀로 선 모든 삼성 출신은 한순간에 주목받던 'somebody'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nobody'가 되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그는 본인의 이름으로 책을 쓴 후배였다.


회사에서도 다양한 글쓰기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본인이 하는 일과 관련하여 책을 썼고, 꽤나 좋은 반응을 얻었다. 책을 통해 '삼성'의 누군가를 졸업하여 '작가'이자 '전문가'인 누군가로 재탄생한 것이었다. 모두가 퇴사 후 활동이 줄어드는 것에 비해 그는 오히려 더욱 바빠졌다. 대기업에 있을 때 따라야만 했던 규칙을 벗어던지자 수많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일의 가치가 '기업'에 축적되는 직장인이 아닌 '본인'에 축적되는 퍼스널 브랜드가 되었다.


두 번째 포도


동종업계에서 흔한 말로 잘 나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같이 술을 먹는 자리에서 그에게 어떻게 영업을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했다. "영업은 하지 않는데요?" 우리 회사와 다르게 그는 클라이언트 확보를 위해 영업을 하지도 않았고, 경쟁 PT는 더더욱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우리 회사가 클라이언트의 면접을 보는 지원자라면, 그는 클라이언트를 면접하는 면접관이었다. 먼저 연락이 오는 클라이언트가 있으면 일의 가치를 보고 할지 말지를 그가 판단한다는 것이었다. 마케팅 대행사는 '을' 중에 '을'인데 그는 '갑'이었다. 그는 대행사의 대표이기 전에 베스트셀러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연락을 하는 사람 대부분은 그의 책을 읽고 감명받은 회사의 대표였다. 그러다 보니 그는 본인이 원하는 방향성, 비용 등에 맞는 프로젝트만 골라서 진행했고, 대표의 지지를 업고 일을 하다 보니 훨씬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비용적으로나 회사 구성원의 만족도를 보나 훨씬 더 나은 여건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두 번의 경험을 통해 포도는 전혀 시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고민은 있었다. 나를 불특정 다수에게 알리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글을 잘 쓸 수 있을 자신이 없었다. 달콤한 포도는 여전히 선택된 자들만의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책에서 본 문구가 나의 등을 힘차게 떠밀었다. 마치 설령 포도 알레르기가 있더라도 포도를 먹으라는 듯이.


최고의 클라이언트와 일을 하고 싶고 최고의 인재를 고용하고 싶다면, 반드시 세상에 본인을 드러내야 한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무방비로 노출한다는 느낌이 들거나, 실제로 그렇다 할지라도 말이다.

- 에밀리 헤이워드의 <Obsessed>(Turnaround Publisher, 2020) 중 -
* 본인 번역


단순히 개인이 아닌 한 회사의 공동창업자로서 책을 쓰고 내가 하는 일을 알리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직원들이 더 나은 여건에서 더 훌륭한 동료들과 일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나를 알리는 작업이 필요했다. 나만을 생각했을 때는 발을 앞으로 내딛을까 말까를 고민했다면, 우리를 생각하게 되니 어떻게 내딛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책을 쓸 결심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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