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은 매일 수 십 명이 달라붙어 발바닥인 기초를 만들고 뼈대인 골조를 세우고 혈관인 배관을 넣고 근육과 살을 몇 달째 만들어가고 있었다. 구조설계와 CIP 이슈를 겪으면서 설계자와 시공자는 서로 어떻게 호흡을 맞출 것인지 서로를 더 알게 되고 적응했다.
현장에서는 초깔끔하고 꼼꼼한 소장이 감독이 되어 설계자가 건네 준 각본으로 연출과 조연출과 조명과 분장 스태프를 지휘하고 배우들과 소통하며 작품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악플러만 아니라면 말이지.
아랫집은 내가 법이 정한 이격거리를 지키지 않았다며 공사를 중지시켜 달라고 건축공사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아랫집 노부부가 기초 공사에 이어 지하층 벽체를 세울 때 줄자를 가지고 와서 거리를 재고 사진을 찍어 갔다고 현장소장이 알려주었다. 그들은 지하층 벽이 자기 집 담장과 너무 가깝다고 소장에게 항의하고, 공사가 계속되자 구청에 민원을 넣었다.
나는 G도시건축의 K실장과 그 집을 방문해서 차근차근 설명을 했고, 따끈한 차를 마시며 대화를 했다. 대화를 하면서 나는 비폭력 대화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내가 보석처럼 인용하던 문구가 틀리지 않음을 확인했다.
말한다고 다 듣는 게 아니다.
듣는다고 다 알아듣는 게 아니다.
알아듣는다고 다 기억하는 게 아니다.
기억한다고 다 믿는 게 아니다.
믿는다고 다 그리하는 게 아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말'로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보다는 현장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 그 노부부는 상대방 말을 아예 듣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이 알아듣고 기억하고 믿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나와 K실장이 말하는 걸 들으면서 그들은 상대방을 경청하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긴 설명을 들은 S 씨가 대답했다.
"법이 그러면 그 법이 잘못된 거야. 내가 그 법을 고칠 거야."
그가 공사 기간 몇 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법과 령과 규칙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고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그는 구청의 민원 회신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공사를 중지하라는 가처분 신청을 서울지법 서부지원에 넣었다.
이 집 짓기에서 1층은 아랫집 경계선과 1m 이상 넉넉히 떨어져 있어서 법을 잘 지키고 있었다. 오히려 옆 건물과는 규정대로 이격거리를 딱 1m 두어서, 아랫집보다 옆 건물과 분쟁의 소지가 백 배 정도 된다.
쟁점은 지하층의 바닥 높이였다. 법에서 정한 지하층 바닥 높이의 정의는 "건축물의 바닥이 지표면 아래에 있는 층으로서 그 바닥으로부터 지표면까지의 높이가 당해 층높이의 2분의 1 이상"이다. 실제 계산은 네 꼭짓점의 가중평균으로 이루어지고 조금 더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도로 쪽 높이와 아랫집 쪽 높이의 차이가 3m일 때, 이 집 지하층의 바닥은 도로 쪽보다 1.5m 이상 낮으면 된다는 식이다. 현장의 지하층은 도로 쪽 지면보다 3m 가까이 낮다. 이 건물 지하층과 아랫집 1층의 높이가 비슷하므로 그 집만 기준으로 하면 우리 지하층이 1층 높이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S 씨는 자신의 집에서는 지하층이 아니라 1층으로 보이므로 1m 이격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초보 건축주인 내가 G 도시건축 실무진, 구청의 담당자, 아는 변호사에게 아무리 확인해도 결론은 같다. 그 결론이라는 게 다름 아니고 법규 문구 그대로이다. 나는 이 가처분 신청이 기각될 것이라고 논리적으로는 확신했다.
문제는 내가 가처분 신청에 대응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건축주로서 공사를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사람이다. 내가 법전이나 컴퓨터나 담당 판사가 아닌 이상, 세상 일에 100%는 없다.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뉴턴이 지구에 있는 모든 걸 떨어뜨려 본 건 아니지 않은가! S 씨가 구청 담당자, G 도시건축 실무자와 짜고 나를 속일 가능성이 1%는 된다.
초보 건축주로서 어마 무시하게 복잡하고 큰 일을 치르고 있으면, 법원이 이런 가처분 신청을 생각지도 않게 덜컥 수용하고 공사 중지 명령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어온다. 끔찍하게 그 자체로 공사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가능성이 크다. 나는 별 걱정 없이 지내던 우호적인 관계까지 괜스레 의심하게 되고 마음은 위축됐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그럴 땐 빨리 돈봉투 들고 가서 합의해."
내게는 그 말이 그럴듯한 해법으로 들렸다. 앞에 만났을 때 S 씨의 남편은 자기 자녀가 아파트를 분양하는 큰 건축회사에 다닌다고 자랑삼아 말했다. 그는 이미 자녀를 통해 관련 법 규정과 현장의 관행을 다 알아봤을 거다. 그러고도 이렇게 가처분 신청까지 하는 건 뭔가 그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일 수 있다. 내가 복잡한 상황에 있다는 걸 아는 지인들은 나를 걱정해서,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흔들렸지만, 결국 법원에서 법대로 대응해 가는 길을 선택했다. 나는 공들여 답변서를 준비하고 가처분 신청을 결정하는 날 법정에 갔다. 가처분 신청 두 어 달 만에 담당 판사는 S 씨의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그는 참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S 씨는 공사 중지 정도가 아니라, 지어지고 있는 건축물을 철거하라는 소송을 또 제기했다. 소송을 제기한 시점은 가처분 결정이 나오기 직전이나 직후가 아니다. 자신이 가처분 신청을 한 지 열흘 만에, 그러니까 가처분 신청 담당판사가 심의를 시작하기도 전이다. 이 소송은 일 년을 훌쩍 넘도록 지루한 공방을 계속했다. S 씨는 재감정을 요구해서 법원이 지정한 감정인이 나와 꼼꼼히 살피고는 감정서를 제출했다. 그는 감정 결과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나오자 추가로 재측량을 요구해서 경계 측량을 다시 하기까지 했다. 마지막에는 감정인의 계산 방법이 잘못됐다며 이의를 또 제기했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과 싸워서 이기려는 것일까?
우리 지하층의 바닥이 규정대로 이기는 하나 다른 이유로 설계보다 10cm 높아지기는 했다. 공기를 단축하느라 작업을 서두르다가 지하층 벽체를 세우고 1층 바닥공사까지 끝나고 나서야 현장 소장이 그걸 발견했다. 높아진 이유는 골조업체가 지하층 바닥의 콘크리트를 설계보다 10cm 높게 시공해서다. 지하층 기초 콘크리트 위에 10cm 정도 두께로 모래 없는 몰탈로 마감해서 매끄러운 주차장 바닥을 만드는 여유를 두어야 하는데, 작업자가 그걸 착각했다. 그걸 알고는 모두가 헐헐하면서 어이없어했으나, 기초가 두꺼워진 게 건물의 안전에 도움이 되면 됐지 나쁘지는 않다. 그 두꺼운 철근콘크리트를 거둬내고 1층 바닥과 지하층 벽체까지 철거한 뒤 다시 시공할 수는 없고, 10cm 두께의 기초 콘크리트를 갈아낼 수도 없어서 그냥 그 위에 몰탈 마감을 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고,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게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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