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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늦은 밤, 가벼운 이슬비가 거리를 적셨다. 여느 때처럼 민준은 골목 귀퉁이에 차를 세우고 빌라의 입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창문의 불빛은 이미 몇 시간 전에 꺼졌지만, 경험상 송현우는 새벽 1시쯤 외출을 감행하기도 한다. 조심스럽게 뒤를 밟았지만, 지금까지는 집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오는 게 전부였다.
피로에 지쳐 민준의 눈꺼풀이 감겨올 때쯤, 송현우의 어머니가 빌라의 대문을 쾅 닫으며 뛰쳐나왔다. 경황없이 집을 나섰는지, 노모의 머리는 헝클어졌고, 편한 옷차림에 얇은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지갑과 휴대전화를 꼭 쥐고,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뭔가 잘못됐다.’
기자로서 민준의 본능이 반응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차에서 나와 충분한 거리를 두며 노모를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가벼운 체구의 여인은 나이에 비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낡은 슬리퍼가 바닥에 찍찍 긁히는 소리를 냈다. 골목은 곧 네온사인과 늦은 밤 상인들로 가득한 큰 길가로 이어졌다. 노모는 망설임 없이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민준도 뒤따라오는 택시에 올라탔다.
"기사님, 저 차 따라가 주세요."
택시 운전사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순순히 차를 몰았다. 송현우의 어머니를 태운 택시가 도시의 밤거리를 가득 메운 차량들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민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 시간에, 그런 옷차림으로 어디로 가는 걸까. 송현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20분쯤 쫓았을까, 택시가 멈춰 선 곳은 한 종합병원의 응급실 앞이었다. 민준은 일부러 조금 떨어진 곳에 택시를 세우고, 그녀가 응급실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왜소한 모습은 차가운 병원의 배경에 비해 더욱 초라해 보였다. 예상치 못한 목적지에 민준이 잠시 멈칫했다. 병원은 치유의 공간이다. 그가 찾던 답을 발견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비에 젖은 차가운 공기가 민준에게 달라붙었다. 그는 재킷을 더 단단히 여미고 입구로 다가갔다. 젖은 바닥 위로 구둣발소리가 울렸다. 응급실 현관을 넘자마자 소독약 냄새와 낯선 기계음이 그를 덮쳤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대기실은 환자와 지친 보호자들로 만원이었다.
민준이 더 나아가기도 전에, 접수 데스크의 간호사가 그를 불렀다.
"저기요, 어떻게 오셨나요?"
"아….. 누굴 좀 만나러 왔습니다."
민준의 말에 간호사는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파서 오신 건가요, 아니면 보호자이신가요?"
"그게, 둘 다 아니긴 한데…"
간호사는 한숨을 쉬며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한데 환자나 보호자가 아니시면 응급실로 들어갈 수 없어요. 보호자는 1명만 체류 가능합니다."
민준은 거짓말을 할까 하다가 멈췄다. 확실하지도 않은데,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돌아서려는데, 마침 응급실의 자동문이 열리며 좁은 틈으로 안이 들여다 보였다. 그리고 송현우를 보았다.
그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오른쪽 다리는 갓 깁스를 한 듯 높이 올려져 있었다. 송현우의 표정은 고통스럽기보다는 짜증과 지루함이 섞인 모습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옆에서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담요를 정리하고 있었다. 민준이 더 자세히 다가가려는데, 자동문이 닫혔다.
송현우가 다쳤다. 그게 노모가 급히 병원에 온 이유였다. 헐레벌떡 집을 뛰쳐나오던 긴박함에 비해 사소한 일이었다. 사고였을까? 갑자기 병원의 응급실에서 자식이 사고로 다쳤다는 소식을 들으면 부상의 정도와 상관없이 여느 부모라도 놀랄 순 있다. 자동문이 열릴 때까지 좀 더 기다려볼까 망설이던 민준은 응급실을 나와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도시의 불빛들이 젖은 도로 위로 반짝였다. 오늘 밤은 여기서 접어야겠다. 어차피 송현우는 다리를 다쳐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테니, 민준은 그동안 재정비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민준은 다시 송현우의 집 근처 골목으로 돌아왔다. 평소처럼 빌라 입구를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골목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몇 시간이 흘렀지만, 송현우는 모습을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어제 그 병원에 입원한 것 같았다. 대신 그의 어머니만이 가끔씩 집에 들러 도시락을 들고 나왔다. 아마 병원으로 가져갈 음식일 것이다.
며칠이 그렇게 흘렀다. 송현우는 예상보다 더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민준은 어머니의 동선만 기록하며 매일 그녀의 피곤한 걸음걸이를 주의 깊게 살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모는 더 지쳐 보였다.
여덟 번째 날, 민준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송현우의 어머니가 하루 종일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평소 이른 아침 도시락과 보온병, 옷가지를 챙겨 병원으로 향하던 그녀의 일상이 끊겼다. 빌라는 조용했고, 창문의 커튼이 닫혀 있었다. 늦은 오후까지 기다려봤지만, 골목 어디에도 노모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민준은 송현우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로비는 여느 때처럼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민준은 로비 중앙 안내 데스크의 직원에게 물었다.
“저기요, 정형외과 병동이 몇 층에 있나요?"
직원이 컴퓨터에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정형외과 병동은 4층에 있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어…… 병문안이요.”
“죄송하지만 코로나 이후로 환자 당 한 명의 보호자만 허용되고, 병문안도 제한되고 있습니다.”
“잠깐 보고 오는 것도 안될까요?”
민준이 애써 실망을 감추며 물었지만, 안내원의 태도는 완강했다.
“네, 병원 정책상 환자의 안전을 위해 병문안은 제한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데스크에서 물러났다. 그는 로비에서 고민하며 서성거렸다. 병동에 접근할 수 없다면 송현우와 노모의 상태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때 갑자기 묘한 직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한창때 수차례 그에게 특종을 안겨주었던 본능이었다.
민준이 다시 안내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혹시 장례식장은 어디에 있나요?"
안내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이내 친절하게 대답했다.
"지하 2층으로 내려가시면 연결 통로가 있습니다. 안쪽의 엘리베이터를 타시면 됩니다."
그녀는 복도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 쪽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민준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버튼을 눌렀다. 조용히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지하 2층에서 문이 열리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병원 로비와 대조되도록 공기는 차갑고 음울했다. 장례식장 간판을 따라 연결 통로를 지나자 복도 양쪽에 화려한 화환 행렬과 추모실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밤이지만 간간이 조문객들이 보였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민준의 눈이 각 방의 명패를 하나하나 훑었다. 구둣발소리가 반짝이는 바닥 위에서 조용히 울렸다. 그러다 민준은 보았다—추모실 문에 적힌 그의 이름을.
민준이 멈춰 섰다. 넋이 나간 듯한 노모가 영정 사진 앞에 상복을 입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불안한 예감이 적중했다.
송현우가 죽었다.
*The embedded image was generated by artificial intelligence.